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청록파 박목월 시인은 경북 경주 출생이다. 1940년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문장』으로 등단했으며, 한양대 교수로 퇴임했다. 불국사 가까운 곳에 문학관이 있고, 영면한 용인공원에 ‘가정’도 시비로 서 있다. 서울대 교수 시절 제자와 사랑에 빠져 제주도로 와 얼마간 살았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결국 헤어지게 되는데 그 때 쓴 시가 가곡 ‘이별의 노래’다.
윗 시는 신발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가장으로서 아버지가 삶의 고달픔 속에서도 가족에 대한 끈끈한 애정을 형상화한 시다. 1연엔 저녁 귀가한 시적 화자가 아홉 컬레 신발을 바라보면서 애잔하고 안쓰러운 분위기가 차분하게 녹아 있다. 2연에서는 자신의 큰 신발과 막내아들의 조그만 신발을 보면서 따뜻한 부정을 느낄 수 있고. 3연에서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지는 내용을. 4연에서는 방으로 들어선 화자가 자신의 큰 신발 속에 아홉 명 자식들의 미래가 들어 있다는 것을 당당한 모습으로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현실적 세계를 시적 대상으로 삼은 생활시로서 진면목을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요즘 어깨가 축 쳐진 아버지들을 자주 본다. 당당한 아버지가 되도록 기를 팍팍 살려주는 가족의 힘찬 박수소릴 듣고 싶다. (오영호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