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사 이야기[1] - ‘구사론’공부를 위해 인도로 떠난 신라구법승 혜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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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사 이야기[1] - ‘구사론’공부를 위해 인도로 떠난 신라구법승 혜륜
  • 안종국 기자
  • 승인 2020.10.21 15: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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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륜이 머물던 중국 서안의 대흥선사
혜륜이 머물던 중국 서안의 대흥선사

 

혜륜의 생애
신라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한 혜륜(慧輪)은 20세 무렵, 보다 넓은 세계에서 보다 깊은 불학을 하고자 험난한 뱃길을 이용해 당나라 복건성으로 갔다. 그는 원효와 의상이 당 유학을 시도했을 무렵에 서해에서 배를 타고 복건성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장안까지는 걸어서 갔다.
신라승 혜륜의 구법로는 신라에서 복건성, 장안, 토번, 네팔로 이어지는 긴 여정으로, 천축의 여러 곳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혜륜은 634년 전후에 신라에서 태어나 30세 무렵인 665년에 현조를 수행하여 인도로 갔다. 혜륜의 스승 현조법사는 두 번 이상 인도를 다녀온 승려로, 현조법사가 인도에 있을 당시 당나라 고종이 사신 왕현책을 천축에 파견하여 현조를 모셔오게 하였다. 유명한 구법승 현조법사가 661년에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 만난 혜륜은 끝까지 그의 스승을 보필한다. 현조법사의 범명(梵名)은 ‘반가사말저(般伽舍末底)’이고, 장안 대흥선사의 현증(玄證)법사에게서 범어를 배웠다.  
왕현책의 천거를 받은 현조가 장안으로 돌아오고 몇 년 후, 고종은 현조에게 카시미르에 가서 고승(高僧) 로가야타(Lokayata, 盧迦溢多) 방사(方士)를 모셔오라는 칙명을 내렸다. 이때 현조법사를 보좌하여 혜륜이 동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조일행이 갖은 고초 끝에 북인도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로가야타와 함께 오던 당나라 사신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로가야타는 현조 일행에게 다시 서인도의 라다국(羅多國)에 가서 장년약(長年藥)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로가야타는 ‘Lokayata’와 같은 음역어로 ‘순세외도’란 뜻이다. 순세론파는 밀교의 삼종수행법(주ㆍ육ㆍ성교)을 실행하는데, 조직상 밀교의 신도인 가파리가(Kapalikas)파에 속한다. 순세론파(대중 속에서 류행한다는 파)는 계속 민간에서 활동하였으므로 당나라 조정에서는 불로장생의 약을 제련하는 바라문과 밀교도를 초청했다. 당 태종과 고종, 태자 이홍(李弘)은 모두 독실한 도교신자로 단약의 효과를 맹신하고 복용하여 목숨을 잃게 되었다. 로가일다 역시 불로를 위한 단약을 위해 고종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현조는 혜륜 등 일행과 함께 카시미르에서 티베트ㆍ네팔로를 이용해 천축으로 가서 여러 곳을 두루 주유하였으나 그 무렵 발생한 아시아의 국제 정세의 변화로 쉽게 귀국할 수 없었다. 토번과 당의 국제관계가 악화되어 토번ㆍ네팔로를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혜륜은 천축에서 불교유적지를 참배하였고, 암마라파왕국에 있는 소승사원 신자사(信者寺)에 10년간 머물며 수행하였다. 스승 현조는 결국 당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신자사에서 673년 무렵 60여 세의 일생을 그곳에서 마쳤다. 신자사는 소승불교 사원이었다고 한다. 인도를 세 번이나 다녀온 당나라 사신 왕현책의 조카였던 지홍도 그곳에서 공부했는데, 그 역시 아비달마(對法)와 구사(俱舍)에 밝았다고 한다. 이로 보아 당시 당에서 온 유학승들이 주로 이곳에서 공부했으며, 공부한 내용도 짐작 할 수 있다. 지금은 신자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그 후 혜륜은 그곳에서 동쪽에 있는 건타라산도사(建陀羅山荼寺)로 옮겨서 수행을 했다. 이 절은 북방의 토화라국(발흐) 승려들이 머물며 공부하던 곳으로, 당시에 경제적으로 매우 여유로웠다고 한다. 당시 북방에서 유학 온 승려들은 모두 이곳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혜륜은 의정을 만났다. 

날란다 대학 승원유적
날란다 대학 승원유적

 

혜륜과 현조법사
 7세기는 동아시아 사회의 총체적 황금기였다. 신라와 당ㆍ티베트는 비슷한 시기에 통일국가를 이루었고, 가장 국제적이고 풍부한 문화와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천축구법승들은 천축과 중국의 불교사상사의 변화에 따라 유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계율을 중시하던 시대에 살았던 백제의 겸익(526~531 천축유학)은 계율을 연구하고 율장을 도입하기 위해 6세기 초에 천축으로 갔다. 그 뒤를 이어 적지 않은 승려들이 불교성지를 순례하고 구사, 계율, 화엄, 밀교 등의 불교학을 심화시키고자 길을 떠났다. 
혜륜은 장안에서 중국어와 범어를 익히고, ‘구사론’을 공부하며 천축유학을 준비했다. 때마침 천축에서 공부하던 현조가 왕현책의 천거로 661년에 장안으로 돌아오자, 혜륜은 현조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천축과 ‘구사론’이라는 두 가지 공통점으로 사제관계가 되었다. 
당시의 중국불교는 ‘구사론’과 계율, 유식학 등, 다양한 불교학이 연구되던 시기로, 의정은 혜륜을 ‘범어를 잘 하고 구사에 밝은’ 신라승으로 기록하였다. 
당시 당(唐)이라는 통일왕조는 튼튼한 경제력과 폭넓은 국제교류가 성황하고 있었으므로 좀 더 정확하고 다양한 원전을 도입하기 위해 수많은 구법승들이 서역과 천축으로 구법행을 떠났다. 
현조 역시 출가한 후 바로 현증(玄證)에게서 범어를 배웠으며, 날란다대학 유학 중에 율(律)은 물론 ‘구사론’을 깊이 공부했다. 그것이 현조와 혜륜을 사제관계로 묶어 주었던 고리였다. 의정 자신도 ‘구사론’을 깊이 공부하였으며, 따라서 그가 혜륜의 가장 큰 특이 사항으로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구사론’은 6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천축과 중국, 신라에서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은 4세기 인도의 세친 스님이 지은 불전으로, 약칭하여 ‘구사론(俱舍論)’으로 불린다. ‘아비달마’는 ‘불법연구’라는 뜻이며, ‘구사’는 ‘창고’라는 뜻이다. 4세기 부파불교 중 최대 종파인 ‘설일체유부’의 교리를 정리한 것으로, 600편의 시와 그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친 스님과 그 맏형인 무착 스님은 중기 대승불교인 유식불교를 창시하였고, 이 종파는 당나라에 법상종을 창시하고 유행시켰다. 신라의 의상 대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이 유식불교를 배워서 신라에 돌아왔으며, 구사론은 이후의 대승불교 교리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타크라마칸사막의 여행자. 혜륜도 이 사막을 건너서 천축으로 들어갔다.
타크라마칸사막의 여행자. 혜륜도 이 사막을 건너서 천축으로 들어갔다.

 

혜륜과 의정
천축구법승 혜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당나라 의정(義淨, 635~713)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 권 上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혜륜전」이다. 고려의 각훈은 그것을 바탕으로 1255년에 ‘해동고승전’을 썼으며, 일연은 ‘삼국유사’, 「귀축제사」조에서 그들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혜륜의 범명(梵名)은 반야발마(般若跋摩, Prajñā varman)로 당에서는 ‘혜갑(慧甲)’으로 번역했다. 혜륜의 출생 시기는 의정의 기록에 근거하여 볼 때 634년 전후로 추정된다. 의정은 자신이 건타라산도사(健陀羅山荼寺)에 갔을 때 혜륜이 그곳에 있었으며, 당시 혜륜의 나이가 40에 가깝다고 하였다. 
의정(635~713)은 673년 2월에 동인도 탐마립저국(耽摩立底國)으로 인도로 갔는데, 그곳에서 그는 당나라 승려 대승등(大乘燈)을 만나 일 년 간 머무르며 범어(梵語)를 익혔다. 
그후 의정은 상인들과 함께 중천축으로 가며 30여국을 주유하였고 마침내 날란다대학에 도착하였다. 또 북쪽의 비사리국(毗舍離國), 서북쪽의 구이나갈(拘彝那竭), 서남쪽의 파라나성(波羅奈城), 동북쪽의 녹원계령(鹿苑雞嶺)을 돌아보며 영취산, 계족산(雞足山), 녹야원, 기원정사 등의 불교 성지를 순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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