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1] - 諺解本 六祖法寶壇經을 게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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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1] - 諺解本 六祖法寶壇經을 게재하면서…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11.11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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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典 중에서 [~~經]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대체로 우리가 알고 있는 文言文으로 쓰여 있기 때문에 그동안의 번역에 오류가 거의 없다. 
그러나 [~~經] 중에서 이 『六祖法寶壇經과 禪師들의 法門 등은 隋·唐代에 쓰인 입말로 쓰인 어록체이기 때문에, 文言文은 물론이고 현대 중국어와도 그 문장구조가 달라, 많은 곳이 誤譯되고 있다.
필자가 『六祖法寶壇經을 연재하면서, 한국에서는 주로 돈황본을 읽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德異本을 고집하는 이유는, 덕이본은 최초의 한글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 諺解가 있어서, 언해의 잘잘못을 밝힐 수 있고, 나아가서는 오늘날 어록체문장을 오역하는 이유 등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것이 옳다면, 일종의 법문집이라고 할 수 있는 『禪要』나 [書狀] 등이, 지금까지

도 잘못 번역되는 곳이 보이는 것은, 언해본에서부터 시작된 오역을 바로잡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하였기 때문이며, 이번 작업을 통하여 어록체문장을 올바르게 번역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필자는 위의 책들을 번역하였고, 그 잘못이 많은 것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본 게재는 오역을 바로잡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할 것이고, 간간히 한자의 본의와 단어에 대한 필자의 생각들을 써 나갈 생각이다.
본 글은 다른 책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사실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필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의 근거를 밝힐 생각이다. 따라서 독자제현께서는 다른 책에서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간과하거나, 그렇지 않은 이유를 분명히 댈 수 없다면, 함부로 폄하하지 말고, 필자에게 의견을 開陳하여 주기 바란다. 이유가 타당하다면 언제라도 고쳐서 게재할 생각이다.
사실 필자는 이전의 설명들과 같은 것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게재할 생각이 없다. 그런 것들은 필자가 아니라도 인터넷을 열어 찾아보면 누구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근거도 없이 필자의 생각을 고집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러면 이번 호에는 古筠比丘 德異의 序부터 읽기로 한다.
妙道ᄂᆞᆫ 虛玄ᄒᆞ야 不可思議니 忘言得旨라ᅀᅡ 端可悟明이리라
【諺解】微妙ᄒᆞᆫ 道ᄂᆞᆫ 虛코 기퍼 어루 ᄉᆞ라ᇰᄒᆞ야 議論티 몯ᄒᆞ리니 말ᄉᆞᆷ 닛고 ᄠᅳᆮ 得ᄒᆞ니ᅀᅡ 正히 어루 아라 ᄇᆞᆯ기리라 (微妙한 도는 虛하고 깊어서 가히 생각하여 議論하지 못할 것이니, 말[言]을 잊고 뜻을 얻어야 바로 가히 깨달아 밝힐 것이다.)
【解說】 ⑴ 글자는 같으나 가리키는 대상은 같지 않을 수 있다. 즉 ‘道’는 儒家에서 말하는 의미와 道家에서 말하는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유가는 仁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仁은 ‘사람(人)이 서로(二) 兼愛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사회(仁이 충만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사회를 유지하는 기준이 道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유가의 道는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性을 잘 따르는 인생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즉 道(↑본문확인)는 주나라 때 글자체인 金文(↑본문확인)과 진나라 때 글자체인 小篆(↑본문확인)을 보면, ‘길거리의 맨 앞(머리)에서 발로 걸어가는 모습, 즉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 引導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中庸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脩道之謂敎 (천이 명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 그것을 일컬어 교라고 한다.)”의 의미는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근거가 性이고, 그 근거를 따르는 올바른 방법(길)이 道이며, 그 올바른 길을 잘 닦는 것이 教이다.”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道家에서 말하는 道와 德은 각각 ‘우주의 총 원리’와 ‘개개 만물의 원리’라고도 한다. 즉 세간에는 사람이나 물 등이 있는데, 본래 그것들은 한 가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 한 가지를 道라고 한다면, 사람이 만들어진 원리는 사람의 德이요, 물이 만들어진 원리는 물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이유들의 모임을 ‘사람의 德’이라고 하고, 물이 물일 수 있는 이유들의 모임을 ‘물의 德’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늘의 달을 道에, 千江에 비춘 달을 德에 비유한다면, 각각의 江에 비춘 달은 그 드러난 相이 다르지만, 모두가 하늘의 달(佛性)이 비춘 것이듯이, 아마도 도가의 道는 불가의 空(佛) 등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가의 道는 불가의 어떤 용어로 대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곳에서 道라고 한 것은 대체로 불가의 空(眞如, 一心) 등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⑵ 玄(↑본문확인)은 갑골문이나 금문 그리고 소전 등이 모두 가죽끈이나 실 등의 묶음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가죽끈은 검정색에 붉은 빛을 띠는 색깔이기 때문에, ‘검을 玄’이라고 하는 ‘검다’는 완전히 검정색이 아니고 진한 밤색 정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牽(↑본문확인)은 ‘소(牛)에 멍에(冖)를 씌우고 고삐(玄)로 끌고 있는 모양’이라고 하는데, 그 글자에 포함된 ‘玄’이 바로 가죽끈인 것이다.
道德經에서 玄이나 常과 같은 글자는 불가의 空 등과 유사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道의 異名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세상에 펼쳐진 만물은 하나하나가 나뉘어 분명한 반면, 만물이 비롯된 道는, 나뉘지 않고 混在되어 있는 것이 마치 玄의 색깔과 같이 그윽한 것과 관련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玄은 미묘한 道(우리는 空이나 부처)가 ‘분별할 수 없이, 텅 비어있고 아련하며 깊은 것’임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⑶ ‘不可思議’와 ‘端可悟明’에 쓰인 可는 助動詞로 ‘…할 수 있다’라는 뜻이지만, 能과는 그 쓰임이 다르다. 즉 能은 主語가 動作의 主體가 되지만, 可은 主語가 動作의 客體(對象)가 된다. 
따라서 ‘端可悟明’을 諺解가 “正히 어루 아라 ᄇᆞᆯ기리라(가히 깨달아 밝힐 것이다)”라는 해석한 것은, 主語가 주체가 되므로, 主語가 動作의 客體가 되는 것을 나타나게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깨달아 밝힐 수 있는 [대상일] 것이다.”라는 해석도 완전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悟明’은 連動詞가 아닌, 動補構造의 複合動詞라면, “밝게 깨달을 수 있다.”라고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悟明’은 “깨달아(悟) 밝히는(明) 것이 아니라, 밝은 정도에(明) 이를 만큼 깨닫다(悟)”라는 의미이다. 
‘放下’와 같은 것을 連動詞라고 생각한다면, ‘[주어가] 놓아두고 내려가다’라는 뜻이므로, 놓는 것도 주어, 내려가는 것도 주어이지만, 동보구조의 복합동사라고 한다면 ‘아래방향으로 놓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놓는 것은 주어이지만, 아래도 내려가는 것은 객체이므로, 둘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상기의 설명들을 참고하여 언해의 해석을 아래와 같이 수정한다.

【飜譯】微妙한 道는 텅 비고 깊어서(그윽하여) 미루어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말(言)을 잊고 뜻(旨)을 얻어야, [비로소] 반드시 밝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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