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21) 감숙성(甘肅省) 둔황(燉煌) 막고굴(莫高窟)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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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21) 감숙성(甘肅省) 둔황(燉煌) 막고굴(莫高窟) (6)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11.1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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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당나라 초기에 그려진 제335굴 북벽의 유마경변상도
(사진 1) 당나라 초기에 그려진 제335굴 북벽의 유마경변상도

 

둔황 막고굴에 그려진 다양한 벽화의 주제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기였다. 하지만 당나라 전성기가 되면 불전보다 경전의 내용을 적은 경변상도가 많이 그려진다. 아미타경, 무량수경, 약사경, 미륵경, 금광명경, 법화경, 부모은중경, 유마힐경 등 대승불교 경전의 중심 내용이 벽화로 그려졌다. 당나라 이전 불경 번역가들에 의해 이미 많은 경전이 한문으로 번역되었고, 당나라 때는 현장(玄奘) 같은 분들이 인도에서 가지고 온 경전을 활발하게 번역한 것도 경변상이 유행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 대승 경전들 중  인도에서 일찍부터 유행했고 중국에서는 삼국시대에 번역된 후 다시 유명한 번역가인 구마라집(鳩摩羅什)과 당나라의 현장(玄奘) 스님이 번역한 것이 널리 유포되었다. 비록 전하지는 않지만 신라의 원효 스님이 주석서를 썼을 정도이니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마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진 2) 제335굴의 유마경변상도 하단에 그려진 조우관을 쓴 우리나라 사신의 모습
(사진 2) 제335굴의 유마경변상도 하단에 그려진 조우관을 쓴 우리나라 사신의 모습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을 전하고 있을 때 중인도에 있는 바이살리에 한 장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유마힐(維摩詰, Vimalakirti)로 심오한 대승불교의 교리에 정통했고 수행의 경지가 깊었다. 그는 지혜로워서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잘 헤아려 적절한 방편으로 법을 전했다. 이런 그를 모든 부처님이 알았고, 보살과 제석천, 범천 등 천신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어느 날 그는 방편으로 자신이 병에 걸린 것처럼 꾸몄다. 이에 바이살리의 국왕은 물론 대신과 바라문, 상인 등 많은 사람이 앞다투어 그를 문병하였다. 그러자 유마힐은 몸의 질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법했다.
“벗들이여, 이 몸은 무상한 것이다. 강한 것도 없고 힘도 없고 굳세고 단단한 것도 없다. 고통으로 고뇌하는 까닭에 온갖 병이 모여들게 된다. 그리고 이 몸은 메아리와 같아서 모든 인연에 종속되어 있고, 뜬구름 같아서 한 순간만 존재할 뿐 결코 오래 머물지 않음은 번갯불 같다. 인연이 모여 생겨난 것이니 이 몸을 지배하는 주체란 있을 수 없다. 몸은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하니 결코 오래 존속하지 않는다. 그대들은 마땅히 이러한 몸을 멀리하는 대신 여래의 몸을 간절히 믿고 따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여래의 몸은 공덕에서 생기고 보시에서 생긴다. 또한 계를 지키는 데서 생기고 삼매와 지혜에서 생기고 해탈을 지각하는 앎에서 생긴다. 또 자비와 동정심, 기쁨, 그리고 평정심에서 생긴다. 따라서 이러한 여래의 몸을 믿고 따르는 마음을 길러야 하며 특히 번뇌라는 병을 끊어내어 깨달음을 향해 발심해야 한다.”   

(사진 3) 당나라 초기에 제 220굴 동벽에 그려진 유마경변상도의 유마와 조우관을 쓴 사신의 모습
(사진 3) 당나라 초기에 제 220굴 동벽에 그려진 유마경변상도의 유마와 조우관을 쓴 사신의 모습

 

유마거사의 이러한 설법에 문병을 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고자 발심한다. 한편 유마거사는 자신의 이런 소문을 들었을 터인데도 어찌 세존께서 사람을 보내 문병하지 않는지 내심 서운해 했다. 세존께서는 유마거사의 이러한 생각을 꿰뚫어 보고 먼저 제자인 사리불에게 유마에게 문병을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고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사리불이 대답하길 이전에 그가 설법하는 것을 들었는데 일언반구도 대꾸할 수 없어서 문병할 여건이 안 된다고 했다. 이어 목련존자, 가섭, 수보리 등 십대 제자는 물론 세존을 따르던 많은 성문들이 갈 수 없는 이유를 고하였다. 이후 미륵보살 등 여러 보살들도 자신과 유마거사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얘기하면서 병문안 가기를 주저했다. 결국 지혜 제일이라는 문수보살에게 다녀오라 하니 문수보살은 흔쾌히 가겠다고 답한다. 많은 사람과 함께 유마의 저택에 도착한 문수보살이 문병하기 위해 거사의 방안으로 들어가니, 방안에는 거사가 누운 침상 외에는 시중드는 사람은 물론 탁자, 의자, 방석도 없었다. 문수보살은 먼저 인사를 한 후 유마거사에게 아픈 원인과 언제부터 아프기 시작했는지, 상태가 어떠하며 언제쯤 나을 것인지 물었다.
이에 유마힐이 답하길,
“이 세상에 어리석음이 남아 있는 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제 아픔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모든 중생들에게 아픔이 남아 있는 한 제 아픔 역시 계속될 것입니다. 만약 모든 중생들이 병고에서 벗어나면 그때 비로소 제 병도 낫겠지요.”
이어 보살을 문병할 때의 태도, 병에 걸린 보살이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법, 병의 원인, 보살이 행해야 하는 법 등에 대해 묻고 답하는데, 이들의 대화를 듣고 문수보살을 뒤따라온 많은 성중들이 발심하게 되고, 이어 유마거사가 그들이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형식이 이어진다. 이렇게 유마경은 유마거사가 병을 방편으로 문병하러 온 문수보살 및 석가모니의 제자들과 불법에 대해 대화하는 극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석가모니의 십대 제자들이 문병가기를 주저하는 설정을 통해 각 제자에게 그들이 행하는 좌선, 설법, 걸식, 공양, 가르침, 천안, 계율, 출가 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상이나 수행 방식에 대해 잘못을 지적하고 바른 길을 제시한다. 문수보살과의 대화에서는 보살행과 지혜와 방편 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구족함을 얘기했다. 이 경전의 최고의 장면은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으로 보살의 깨달음의 경지라는 불이(不二)에 대해 말해줄 것을 요청하자 묵묵히 침묵을 지킴으로써 깨달음의 세계가 문자도 없고 말도 없으며 마음의 움직임도 없는 경지임을 직접 보여줌으로 보살들에게 깨달음을 전한다. 이처럼 이 경은 반야경의 공(空)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재가신도와 보살의 수행해야 할 덕목과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대승불교 경전 중 하나이다. 

(사진 4) 당나라 장회태자묘에 그려진 조우관을 쓴 우리나라 사신의 모습
(사진 4) 당나라 장회태자묘에 그려진 조우관을 쓴 우리나라 사신의 모습

 

당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제335굴 북벽에 문수보살과 유마거사가 대화하는 장면(사진 1)이 그려졌다. 둔황 막고굴에 그려진 유마경변상도의 특징은 문수보살과 유마거사가 서로 자리에 앉은 모습으로 그려지고, 그 주위에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들과 함께 따라 온 사람들이 표현된다. 문수보살에게는 왕과 대신들의 모습이, 유마거사에게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신들의 모습이 표현된다. 놀라운 사실은 이 사신들 중에 우리나라(고구려 또는 신라) 사신의 모습이 그려진 것이다. 다른 사신들과 달리 머리에 새 깃털이 달린 조우관을 쓰고 있는 인물(사진2)이 한반도에서 간 사신이다. 이러한 모습은 220굴(사진 3)과 332굴, 103굴 등의 유마경변상도에서도 나타난다. 조우관을 쓴 인물은 염입본이 그린 양직공도나 당나라 고종의 아들인 장회태자묘에 그려진 사신도에도 등장한다. 이들과 함께 둔황 벽화에 등장하는 조우관을 쓴 인물은 고대 한국인의 모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둔황에서 우리 조상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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