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1. 이것은 참으로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아라한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장애도 나는 보지 못하였나니 이 장애에 덮여서 사람들은 오랜 세월 치달리고 윤회한다. 비구들이여, 그것은 이 무명의 장애이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무명의 장애에 덮여서 사람들은 오랜 세월 치달리고 윤회한다.”
이러한 뜻을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2. 이 경에서 이것을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덮여서
낮과 밤을 윤회하나니
그것은 어리석음에 덮인 것
그 이외에 어떤 법도 없노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어둠의 무더기를 흩어버렸던
그들은 다시 윤회하지 않나니
그들에게 원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셨으니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해설】
법문을 하다보면 부처님께서는 윤회를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하는 재가불자들의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들이 부처님께서 윤회를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아마도 ‘무아인데, 누가 윤회하는가?’하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역자는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이미 윤회를 부정하는 주장들을 비판하였고, 『초기불교 이해』나『초기불교 입문』등의 불서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였다. 여기서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힌두교의 재再 육화肉化와 불교의 재생再生은 구분이 되어야 한다. 불변하는 아뜨만(자아)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재 육화’하는 것이 힌두교의 윤회이다. 그래서 이것은 ‘자아의 윤회’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 금생의 흐름[相續, santati]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재생(rebirth)이 불교의 윤회이다. 물론 아라한은 이러한 다시 태어남, 즉 재생과 윤회가 없다. 그리고 다시 태어남의 원인을 갈애(tanhā)로 들고 있고 초기불전에서는 갈애를 ‘재생을 하게 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윤회는 재생이요, 이것은 오온의 흐름이다. 요컨대 ‘무아의 윤회’이다.
둘째, 그러면 불교의 윤회는 어떻게 설명되는가? 주석서의 도처에서는 “오온·12처·18계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을 윤회라 한다.”, 혹은 “윤회란 무더기 등이 끊임없이 전개되어 가는 연속이다.”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윤회는 오온의 찰나 생生 · 찰나 멸滅의 흐름인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오온-12처-18계의 연기적 흐름을 윤회라고 멋지게 정의한다.
셋째, 윤회의 원어는 삼사라(saṁsāra)인데, 문자적으로는 ‘함께(saṁ) 흘러가는 것(sāra), 함께 움직이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자아의 재 육화보다는 오히려 연기·무아적인 흐름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무아(연기)와 윤회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여기서 ‘장애’라 함은 주석가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하지 못하게 막는 정신적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주석서에서는 이들이 천상의 길과 열반의 길을 방해하기 때문에 장애라 한다고 덧붙인다.
『초기 경』에서는 장애는 대부분 ‘다섯 가지 장애[五蓋], 즉 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의 장애, ② 악의의 장애, ③ 해태와 혼침의 장애, ④ 들뜸과 후회의 장애, ⑤ 의심의 장애로 정형화되어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여기에다 무명의 장애를 더하여 여섯 가지 장애로 정형화되어 있다.
‘무명의 장애’는 초기 경의 여러 곳에서 단독으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 「존재 경」(A3:76)에 나타난 것을 인용하면 이렇다. “아난다여, 이처럼 업은 들판이고 알음알이는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중생들은 무명의 장애로 덮이고 갈애의 족쇄에 묶여서 저열한 욕계에서… 중간의 색계에서… 수승한 무색계에서…
알음알이를 확립한다. 이와 같이 내생에 다시 존재[再有]하게 된다. 아난다여, 이런 것이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