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 有情과 無情이 모두 佛性이고, 마음 고요한 자리가 法界淸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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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有情과 無情이 모두 佛性이고, 마음 고요한 자리가 法界淸淨이로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11.1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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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관정사 삼존불 봉안식 혜국 큰스님 법문
혜관정사 삼존불 봉안식 법회에서 법문을 하는 혜국 스님
혜관정사 삼존불 봉안식 법회에서 법문을 하는 혜국 스님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라, 모든 것은 눈에 보일 때는 고정되어있는 모습으로 보이나, 이 혜관정사라고 하는 거룩한 법당부터가 허공에 떠있는 태양 주위를 돌고 돌듯, 인간 백년이라는 것이 참으로 잠깐입니다. 사람 몸 받았을 때, 내 마음을 닦지 못하면 다른 생애에 이 마음 한번 닦아보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 부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 자신이 자신을 가만히 돌아보면,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얼마나 달라졌는가? 내 인생점수가 과연 얼마나 올라갔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아 부끄러워질 때가 많습니다. 오늘 이렇게 혜관정사 거룩한 점안불사에 오셔서, 우리 마음속 점안이 바로 부처님 점안이요, 부처님 점안이 우리들 마음속 점안이 되게끔, 내 마음과 부처님 마음의 벽을 허물어 하나가 되는 마음이 내 마음속에서 우리들 마음속에서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즘은 참으로 불사를 하기가 어려운 시기입니다. 오늘 이렇게 혜관정사에서 거룩한 삼존불을 모시고 종각을 지어가는 스님의 모습에 마음속으로부터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그리고 이런 거룩한 불사에 동참해주신 여러 불자님들 참으로 큰일을 하셨습니다. 그런 만큼 오늘 여러 불자님들이 이 점안식에 오셔서 내 마음의 눈을 얼마나 뜨고 가실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 무엇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는지? 한번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마음의 눈을 뜨고 가십시다. 지금 이 혜관정사를 비추는 태양 광명은 미국도 인도도 우리나라도 똑같이 비추고 있습니다. 저 지구 반대편에는 아직 어둠이 있지만, 오늘 점안식을 모시는 거룩하신 삼존불의 비추시는 자비광명에는 어둠이 없습니다. 저는 절집에 들어온 지 올해 60년째인데, 지난 60년 동안 스님생활을 하면서 아직도 부처님에게 절을 할 때면, ‘다음 생에도 꼭 스님의 길을 가게 해주십시오, 지켜봐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다음 생에도 스님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부처님 법을 고마워하며 따르는 이유는, 부처님 말씀하시기를, ‘여러분들의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님의 마음이 곧 여러분의 마음’이라는 그 부처 자리, 생명의 본질에는 어떤 죄도 묻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익힌 습관일 뿐이지, 우리의 본질 자체에는 어둠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라 가르침을 받는 불자로 살아가며, 이러한 점안불사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복 중의 복입니다. 이런 복은 우리 마음의 본질에는 어떤 죄도 묻지 않는 것은 청정 공성(空性)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혜관정사 점안식에 참석하신 분들의 일부는 안에 있고 일부는 밖에 있습니다. 안과 밖이 생기는 이유는 단 하나, 저 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벽을 허물어 버리면 안도 없고 밖도 없게 되어, 우리는 한 공성에 앉게 됩니다. 그 벽을 허물어 버리는 것을 우리는 점안식이라고 하고, 그 자리를 우리는 불안(佛眼)이라 합니다. 왜 육신의 눈인 육안(肉眼)에 점안을 할까를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육안, 천안, 법안, 혜안, 불안 중 오로지 육안만 알고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내 안의 눈이 뜨이는 만큼 세상은 달리 보입니다. 내 마음의 문을 얼마나 열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병원에 가보세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병원에 누워, 이런 불사에 한번만이라도 동참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제 발로 걷고 듣고 싶은 소리를 듣고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하물며 오늘 이런 거룩한 법회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 거룩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큰 행복이겠습니까? 마음은 넓게 쓰면 태평양보다 더 넓힐 수 있고, 좁게 쓰면 바늘 귀 만큼이나 좁아집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원래 우리의 얼굴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얼굴표정은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바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말을 듣지 않는 자식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과 나의 업이 그렇다는 것을 깨달으면 자식과의 관계도 달라집니다. 인과관계만 이해하면 여러분들의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만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생명이 나를 떠받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생명을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 우주의 거울에 나는 어떻게 어떤 존재로 비춰지고 있을 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부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큰 가르침은 일체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모두 불성(佛性)이라는 말입니다. 마음이 고요한 자리에서 지킬 것 없는 자리까지 들어가면, 무념이라 온 법계(法界)가 청정입니다. 내가 우주고 우주가 곧 나라는 그 자리가 공성(空性)이고, 이 공성이 여러분들의 본 마음의 고향인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공성이 있는데 자기 마음을 조그맣게 쓰다가 죽으면,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 몸이 우주요, 우주가 내 몸임을,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결코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 모두 내가 만든 것임을, 내가 주인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점안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거룩한 삼존불을 모시는 혜관정사의 불사나 점안식에 동참하신 여러분들은 바로 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귀한 자리에 오신 것이고, 이 자리에서  이 고귀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마음 돌이키면, 여러분들은 바로 우리들 마음의 고향인 청정 공성(空性)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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