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에세이 - 파초芭蕉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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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에세이 - 파초芭蕉 명상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11.2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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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현
유 현

일흔 살이 넘어서도 사무실로 출근한다. 정년 없는 직업을 가져서 누군가 축복이라 말하지만 이제 쉬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노안老眼 탓이다.
출근 후 퇴근까지 돋보기안경을 쓰고 사건기록을 살피고 전자소송에 접속하기 위해 컴퓨터와 씨름하다보면 눈이 침침하고 쪼여드는 느낌이 심해져서다.
이럴 때 일어서서 북쪽 창가로 다가선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심호흡을 몇 차례 하고 나서 창밖의 파란 하늘을 바라보곤 한다. 나 자신을 위한 일종의 타임아웃으로 서류들과 송사訟事들을 뒤로 한 잠깐의 외출인 셈이다.
창가의 선반위에 파초 화분이 놓여 있다. 원래 난분蘭盆이 있던 자리다. 선비의 품격을 닮았다 해서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하며 풋풋한 향기를 내뿜던 화초인데, 인연도 시드는지 파초에게 밀려났다. 
‘파초가 있는 풍경’은 옛 문인들의 시와 그림 속에서 만날 수 있다. 내 기억 속에 또렷한 인상을 남긴 파초는 고등학교 때 배운 김동명 시인의 <파초>이다.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절을 자주 찾는 사람이라면 어느 절에선가 법당 섬돌 아래쯤에서 푸르른 파초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 22대 왕 정조는 세손 시절 섬돌 앞에 파초를 심고 훗날 군왕의 자리에 오르면 왕도정치를 펼치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정조의<파초도>는 보물 제743호로 지정돼 있다.
파초를 좋아하여 ‘마음의 벗’이라 부른 선비는 연암 박지원이다. 문우들과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옛사람 중에는 파초를 벗한 이가 없는데, 나는 유독 파초를 사랑하지요. 줄기는 비록 백 겹으로 돌돌 말려 있지만 가운데가 본래 텅 비어 한번 잎을 펼치면 아무런 꾸밈이 없으니, 이 때문에 나의 마음을 터놓는 벗이 된 것이라오.”
파초가 내 벗이 된 이유는, ‘유마힐’ 거사의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파초는 나무처럼 보이지만 나이테가 없고 그 속은 알맹이도 없고 견고함도 없지만, 자르면 그 위에 다시 싹이 올라온다. 이 몸 또한 파초와 같아 속에 견고함이 있지 않다(是身如芭蕉, 中無有堅)”라고 말했다.
이 몸 안에서 느낌[受]과 지각[想, saňňā]이 쌍둥이처럼 함께 생기면 이를 바탕으로 다양하게 조합된 심리현상들[行, sańkhārā]이 뒤따라 일어난다. 우리 불자들이 법회에서 반드시 수지, 독송하는「반야심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오온五蘊 가운데, ‘수·상·행’의 법(dhamma)을 지칭한다.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파초의 비유’라는 설법이 나온다. 마치 파초의 줄기가 많은 잎과 껍질 등으로 조합돼 겉모양은 마치 시멘트로 만든 튼튼한 기둥처럼 보이지만 이 튼튼한 듯 보이는 기둥의 속이 텅 비어 있듯이 사람들의 다양하고 강렬한 심리현상들도 모두 뭉쳐 두면 단단한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통찰지라는 도끼로 분해하고 해체해서 보면 속이 텅 빈 실체(자아)가 없는 파초와 같다고.  
고갱이[心材]가 없다는 말이다. 흙으로 만든 화초 화분도 흙만 있고 그릇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릇이라는 이름이나 개념은 그저 흙덩이의 결합이 형상화된 모양을 근거로 마음이 취한 이미지나 영상에 불과하다.
시인이 파초를 읊조리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정조대왕은 파초의 넓은 잎에서 위민爲民을 꿈꾼다. 이처럼 어떤 인식이나 견해든 일단 거기에 매달리게 되면 우리는 사물의 참모습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기[如實知見] 어렵다.  
각자의 관념과 이념, 또는 지각이나 인식을 자기와 동일시同一視하게 되면  고정관념으로 뿌리내려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이를 선전, 옹호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요즘 적폐청산이니 검찰개혁이니 하면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것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해로운 심리적 경향인 집착[見取]이다. 이 갑옷 같은 견해의 벽을 깨뜨리지 못하면 자승자박하는 꼴이 돼버리고 소통과 공감은 막힌다.「금강경」에서 버리고 극복해야 할 대표적인 인식으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네 가지를 강조하고 있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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