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1. 이것은 참으로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아라한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족쇄도 나는 보지 못하였나니 이 족쇄에 묶여서 사람들은 오랜 세월 치달리고 윤회한다. 비구들이여, 그것은 바로 이 갈애의 족쇄이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갈애의 족쇄에 묶여서 사람들은 오랜 세월 치달리고 윤회한다.”
이러한 뜻을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2. 이 경에서 이것을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갈애와 짝하는 사람은
오랜 세월 윤회하여
이 존재와 또 다른 존재가
연속하여 전개되는
윤회를 넘어서지 못한다.
비구는 그 위험함을 알고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임을 알아
갈애를 건너 거머쥐지 않으며
마음 챙겨 유행하노라.
이러한 뜻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셨으니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해설】
『이띠웃따까 주석서』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무명(avijja)은 다섯 가지 장애에, 갈애(tanhā)는 10가지 족쇄에 포함되지 않지만 이 둘은 12연기에서 두 가지의 뿌리가 되는 원인으로 나타난다. 무명의 들판은 과거의 길이고, 갈애의 들판은 미래의 길이다.
4부 니까야(아함경)의 여러 곳에서 무명의 장애와 갈애의 족쇄라는 언급이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여기서 인용하는『앙굿따라 니까야』제1권「존재 경」(A3:76)이 좋은 예이다. “아난다여, 이처럼 업은 들판이고 알음알이는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중생들은 무명의 장애로 덮이고 갈애의 족쇄에 묶여서 저열한 욕계에서… 중간의 색계에서… 수승한 무색계에서… 알음알이를 확립한다. 이와 같이 내생에 다시 존재[再有]하게 된다. 아난다여, 이런 것이 존재이다.”
여기서 ‘이 존재’라 함은 인간을, ‘다른 존재’는 이 이외의 나머지 중생의 거처들을 의미하거나, 또는 ‘이 존재’는 이런저런 중생들의 현재의 자기 존재를, ‘다른 존재’는 미래의 자기 존재를 말한다. 혹은 이러한 모습을 가진 다른 이의 자기 존재도 이 존재이다. 이러한 모습을 가진 자는 또 다른 존재가 아니다.
이러한 존재이든, 또 다른 존재이든 윤회, 즉 무더기[5蘊] · 감각장소[12處] · 요소[18界]의 연속인 그런 윤회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인간이 존재한다.’ 또는 ‘생명(有情)이 존재한다.’라는 말은 사람들의 일반적 합의에 따른 관습적으로 쓰이는 말이어서 세간의 입장에서는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빠라맛따싯짜(paramatthasacca, 긍극적 진리)의 시각에서 보면 불변하는 영혼이나 생명이 존재하여 윤회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와지라 경」(S5:10)에는 “마치 부품들을 조립한 것이 있을 때 ‘마차’라는 명칭이 있는 것처럼 무더기들[蘊]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마차’는 개념적 존재의 본보기이고 ‘부품들’은 법들의 본보기이다.
강江이라 할 때 거기에는 최소 단위인 물의 요소들이 모여서 흘러감이 있을 뿐 강이라는 불변하는 고유의 물질은 없다. 그들은 마음이 만들어 낸 개념이지 그들의 본성에 의해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다.
여기서 “위험함을 알고서”라 함은 윤회의 괴로움의 근원이요 일어남인 갈애가 위험인 것을 위험함이라고 알고서라는 뜻이다. 본서 「갈애의 일어남 경」(It4:6) §2의 같은 게송에 대해서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과거·미래·현재의 무더기(온)에 대해서 이 존재와 또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그 위험을 알고서라는 뜻이다.”
갈애는 어디에서 일어나고 뿌리를 내리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서 거기서 자리 잡는다. 형상, 소리, 냄새, 맛, 신체적 접촉, 정신적 대상[法]은 낙樂과 즐거움을 준다. 거기서 갈애는 일어나고 뿌리를 내린다.”(대념처경:D22)
사람들은 이 여섯 감각 대상을 쫓으며 그것들에 매달리지만 그 어느 것도 그 자신을 절대로 만족시켜 줄 수 없다. 갖고 싶은 것을 소유하려 하고 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는 강렬한 목마름 속에서 사람들은 윤회의 수레바퀴에 매이지 않을 수 없고 격심한 고뇌의 바큇살 사이에서 뒤틀리고 찢기며 살 수밖에 없다. 부처님께서 이런 광란의 질주를 단호하게 질책하시며 경고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