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에세이 - 연못에 비친 달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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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에세이 - 연못에 비친 달그림자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12.09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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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
유현

내 집 남쪽 뜰에는 비자나무, 매화나무, 감나무, 목련, 애기동백 등이 나란히 서있다. 이 나무들은 제각기 늠름한 풍채와 아름다움이 있어서 그 수격樹格이 다르다. 
나무가 있어야 새들은 뜰 안에 깃든다. 단골손님은 동박새와 직박구리이다.
늦가을 뼈만 앙상한 감나무 가지에 노란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이 놈들은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옮겨 다니며 연신 부리로 홍시를 쪼아댄다. 여름철에는 무화과, 추운 겨울에는 페리칸사스의 빨간 열매가 있어서 뜰 안을 떠나지 않고 있다.  
새들이 잠시 한 나뭇가지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듯 마치 내 생각과 감정은 좋은 나뭇가지와 나쁜 나뭇가지, 즐거운 나뭇가지와 불쾌한 나뭇가지를 살피며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아다닌다. 생각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원숭이처럼 즐겁고 달콤한 나뭇가지에만 느낌과 함께 내려앉는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의 대다수가 언제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불평을 토해 낸다. 쉴 새 없이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고 디지털 기술에 익숙해야 하며 정보의 홍수에 일상의 삶이 버거워서 그럴 법하다.
사람은 한시도 생각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지만 생각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생각의 노예로 떨어져버릴 수 있다. 이럴 때 어떤 나뭇가지에 앉아 있든 간에 그곳에서 보이는 것, 즉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의 모양과 색깔을 겨냥하고, 하나의 나뭇가지 위에서 고요한 휴식을 취해보자.
이런 명상 기법을 산스크리트어로 ‘사마타’라고, 티베트어로 ‘시네’라고 말한다. 심리적, 감정적 들뜸 상태를 가라앉히고 평화, 휴식의 현존함을 뜻한다. 나는 매일 아침 호흡을 닻으로 여기에 집중하는 20여 분의 호흡명상을 통해 번뇌·망상들을 청소하고 있다. ‘생각의 멈춤 상태[止]’에 마음이 길들여지면, ‘대상 없는 바라보기’로 명상의 단계로 한 계단 더 오를 수 있다. 
주말에 도시인들은 속세의 번잡함을 피해 산행 길에 나선다. 나 자신도 지난 주말 ‘말찻 오름’의 등산에 나서 약 2시간 반 정도 걸었다. 
위를 쳐다보니 나목裸木 사이에 파란 하늘이 보이고, 발아래를 내려 보니 이끼 낀 작은 돌무더기와 늘 푸른 조릿대 군락이 보이고,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옛 선사들이 비유하듯이 ‘연못에 비친 달’처럼 단지 바라보기만 한다.  
같은 산행의 길목에 가끔 오고가는 사람들과 마주치지만 종점까지 침묵이 흘렀다. 여기엔 취하고 버리거나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의 작용이 없기에 괴로움도 없다. 순수 자각, 알아차림과 깨닫기만 현존하고 있을 뿐이다.
마음은 땅과 같고 나무와 같다. 이 사물은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된다고 간택하지 않는다. 마치 마음처럼 그냥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생각 놀음은 마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에 내재하는 비非 실재적 성격 때문에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여 온갖 망상의 태풍 속으로 몰아넣어 고통을 맛보게 한다.
‘내 것’과 ‘남의 것’, 또는 ‘내 생각’과 ‘네 생각’과 같은 집착[取]의 부정적 심리현상을 부수는 명상 기법을 산스크리트어로 ‘위빳사나’, 티베트어로 ‘학통’이라 말한다. 
들뜨고 분주한 게 이 속세이다. 생각은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영역에 제약당하는 것이지만 생각의 지멸止滅은 마음을 무한대, 무시간의 상태로 활짝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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