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24) - 감숙성(甘肅省) 둔황(燉煌) 막고굴(莫高窟)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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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24) - 감숙성(甘肅省) 둔황(燉煌) 막고굴(莫高窟) (9)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12.2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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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둔황 제87굴 남벽 천정부에 그려진 법화경변상도
(사진 1) 둔황 제87굴 남벽 천정부에 그려진 법화경변상도

 

둔황 막고굴에는 여러 불교 경전의 내용을 벽에다 그린 경변상도가 있는데, 주로 당나라 때 많이 그려졌다. 당나라는 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시대 말부터 통일신라시대(남북국시대)에 있었던 중국의 왕조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통일신라시대에는 전국 곳곳에 많은 사찰과 탑이 세워지고 불교 예술도 화려하게 꽃피웠다. 불국사, 석굴암, 에밀레종 등 불교 미술의 전성기라 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불화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완전하지 않고 작은 그림인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국보 제196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잔편을 통해 당시 불화의 수준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에 솔거(率居)라는 화가가 황룡사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그림이 너무 생생해서 새들이 날아와 벽에 부딪혔다고 하고, 분황사에 〈관음보살도〉, 단속사에 〈유마상〉도 그렸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는 흥륜사 〈보현보살도〉와 눈 먼 아이 눈을 뜨게 한 분황사의 〈천수대비벽화〉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유추해보면 신라의 사찰 벽에도 둔황 막고굴처럼 벽화가 그려졌고, 특히 유마상을 그렸다는 것에서는 유마경변상도와 같은 그림도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사진 2)  둔황 제87굴 법화경변상도 중앙의 서품과 상단부의 견보탑품 장면
(사진 2) 둔황 제87굴 법화경변상도 중앙의 서품과 상단부의 견보탑품 장면

 

하지만 전하는 것이 너무 없어서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최근 동국대 한정호 교수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수구즉득대자재다라니〉에서 금강역사상과 신라인으로 추정되는 그림 잔편을 소개했는데, 워낙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나온 발견이어서 “야!”라고 탄성을 하며 반겼지만 둔황 막고굴 벽화와 비교하면 10여 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그림 조각을 발견하고 탄성하는 상황이어서 한편으로는 매우 서글펐다. 둔황은 석굴을 파서 그 안에 불상을 안치하고 벽화를 그렸고, 이후에 외적의 침입을 거의 받지 않았으며 자연 조건도 건조한 기후여서 유물이 지금까지도 잘 유지될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목조 건물 불화를 봉안하거나 벽에 그렸는데, 목조 건물이 화재에 약하다는 점과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온전하게 남아 전하는 게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가항력적인 상황 때문이지 우리의 문화적 역량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부럽지만 기죽을 필요는 없다고 자위했다. 
법화경은 중국에 삼국시대에 전래되었다. 혜초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이 나온 둔황 장경동에서 함께 수습된 경전 중에는 법화경의 수가 적지 않다. 대부분 구마라집이 번역한 28품의 묘법연화경이어서 둔황에서 그려진 법화경변상도는  이에 의거해 그려진 것으로 파악한다. 특히 수나라 때 지의(智顗)가 천태종을 창립하고 법화경을 이론적 기반으로 삼은 것이 수와 당나라 때 법화경이 민간에 널리 유통되고, 법화신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둔황에서 견보탑품에 나오는 장면인 석가모니와 다보부처님이 함께 자리한 이불병좌상은 일찍부터 만들어졌지만, 벽화로 법화경변상도가 처음 등장하는 굴로는 수나라 때 만들어진 제419, 420, 303굴을 꼽을 수 있다. 굴의 천정부에 서품, 방편품, 비유품, 화성유품, 견보탑품, 관세음보살보문품을 그렸다. 이후 당나라가 되면 법화경변상도는 아주 활발하게 그려지는데, 주로 중앙에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서품을 배치하고 주변에 중요한 품들을 표현한다. 일부 벽화에서는 장명 옆에 사각형 방제를 만들어 그 장면이 어떤 것인지 글로 적은 형식을 취한다. 

(사진 3) 둔황 제87굴 법화경변상도 오른쪽 부분으로 하단에 비유품과 상단의 관세음보살보문품 등의 장면
(사진 3) 둔황 제87굴 법화경변상도 오른쪽 부분으로 하단에 비유품과 상단의 관세음보살보문품 등의 장면

 

당나라 말 안사의 난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티베트의 토번이 둔황에 들어와 약 70년간 지배한다. 이후 848년 둔황 지역의 한인 세력가인 장의조(張議潮)가 토번으로부터 둔황을 되찾아 황제에게 바치니 황제는 그를 귀의군(歸議軍) 절도사로 임명하여 둔황을 통치하게 한다. 이후 장씨가 당나라가 망할 때까지 절도사를 세습한다. 장씨가 지배를 하던 시기인 862-867년에 만들어진 제85굴에는 그 시기에 그려진 가장 크고 화려한 법화경변상도(사진 1)가 있다. 28품 중 24품의 내용이 그려졌는데 그 내용은 중당 시기에 그려진 제159굴의 변상도와 큰 차이는 없다. 다만 작 장면 옆에 그 장면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리는 방제가 무려 106개나 만들어졌다. 둔황 벽화 중에 방제가 가장 많은 변상도인데, 방제와 그림이 맞지 않는 것도 있어서 방제를 쓴 사람과 화가가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변상도는 벽과 좁은 천정으로 이어지는 마름모형의 화면에 그려졌다. 
화면의 중앙 가운데(사진 2)에는 법화경을 설법하는 설법도인 서품을 배치하고, 그 아래에 작지만 방편품을, 주변에는 다시 방편품과 다라니품, 종지용출품, 제바달다품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상부에는 탑 안에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견보탑품을 중심으로 촉루품, 오백제자수기품, 분별공덕품 등을 그렸다. 화면 오른쪽(사진 3)에는 상부에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중심으로 약왕보살본사품 등을, 하단에는 불이 난 집과 담장 밖에 양, 사슴, 소가 끄는 수레를 그린 비유품을 배치하였다. 화면 왼쪽(사진 4)은 오른쪽과 대칭되게 표현하였는데, 상단에는 관세음보살보문품의 여러 장면과 약왕보살본사품, 오백제자수기품 등을, 중앙에 화성유품, 하단에는 화려한 집과 마차가 표현된 신해품을 묘사하였다. 이 법화경변상도는 좌우대칭의 구도로 안정된 느낌과 은은한 색채감 및 결실된 부분도 적어서 만당 시기에 그려진 대표작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사진 4) 둔황 제87굴 법화경변상도 왼쪽 부분으로 관세음보살보문품, 화성유품 및 하단의 신해품 장면
(사진 4) 둔황 제87굴 법화경변상도 왼쪽 부분으로 관세음보살보문품, 화성유품 및 하단의 신해품 장면

 

둔황벽화를 연구한 중국학자 하세철(賀世哲) 등의 자료에 의하면 둔황 석굴에 그려진 법화경변상도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장면은 견보탑품이고, 그 다음으로 서품과 비유품이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은 고난에서 구제받기를 바라는 염원을 실었고, 서품은 이야기의 시작이니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당연하다. 비유품에서 유명한 ‘법화칠유’ 중 화택의 비유가 주로 그려졌는데, 이는 법화경의 내용을 담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화택의 비유는 아버지가 집에 불이 났지만 놀이에 빠져 나올 줄 모르는 아이들을 보고, 밖에 양, 사슴(말), 소가 끄는 보배로 가득 찬 수레가 있다고 하여 불난 집에서 아이들을 구해낸 뒤 아이들을 커다란 흰 소가 끄는 수레에 태워간다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양, 사슴(말), 소는 성문, 연각, 보살을 의미하고, 흰 소가 끄는 수레는 부처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문, 연각, 보살 삼승이 별개의 가르침이 아니라 모두 모두 부처님이 중생을 인도하기 위한 방편일 뿐 진실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즉 일승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유유일승법 무이역무삼(唯有一乘法 無二亦無三)’이라는 구절을 통해 회삼귀일(會三歸一)을 강조하는 것이 법화경의 내용을 음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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