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문’과‘점문’의 치열한 대립, 삼예사 논쟁의 의미 ③
상태바
‘돈문’과‘점문’의 치열한 대립, 삼예사 논쟁의 의미 ③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12.30 12: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불교의 전통은 무엇인가? 돈오돈수인가 돈오점수인가? 지관쌍운과 정혜쌍수의 전통은 왜 이어지지 못했는가? 현대 한국불교는‘선’과‘위빠사나’의 흐름이 상호 대립하는 듯이 보인다. 이미 1,200년 전 티베트에서도 같은 논쟁이 불붙었다. 권표 스님은 불과 1~20년 사이에 널리 퍼진‘위빠사나’와 신라 선종구산 이후 오랜 전통이 된 한국불교의‘선’의 관계를 재조명하기 위한 고민과 의견을 본지에 보내왔다. / 편집자 주   

 

권표 스님 _ 제주시 화북 원명선원 한주
권표 스님 _ 제주시 화북 원명선원 한주

3. 
지관쌍운-점문파의 승리

이어서 인도불교 측 대표 가운데 한명으로 참여했던 예셰왕뽀가 마하연의 주장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해탈의 방편인 수행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돈오(頓悟)한다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까말라실라는 무분별지(無分別智)란 단순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체법은 무자성이다.”라는 명확한 언어표현을 동반한 공성의 지혜(반야)가 장기간의 수행을 통하여 순차적으로 달성되어 얻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마하연의 불사불관의 주장은 인식의 확장을 통해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는 점오(漸悟)의 입장과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까말라실라와 예셰왕뽀의 빈틈없는 논리에 마하연은 어떤 답변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는 까말라실라에게 꽃을 바치며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고 논쟁의 시작에 앞서 약속했던 것처럼 티베트를 떠나 둔황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논쟁이 끝나자 중국 선불교 측 인사들은 또다시 분신 등으로 격렬히 저항했다. 그러나 돈오는 점오의 사상적 흐름을 거스르기에는 논리적으로 역부족이었다. 분을 참지 못한 마하연은 훗날 자객을 보내 까말라실라를 살해했다. 예셰왕뽀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다 스스로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8세기 말 티베트의 수도 라사의 삼예사에서 일어난 까말라실라와 마하연 사이의 논쟁은 서로 대립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자는 인간의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여러 방편의 사용이 있어야 함을 요구하는 반면에 후자는 이러한 점진적 수행체제로는 결국 어떤 종류의 분별적 사고로부터도 벗어난 해탈에는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서의 두 수행 종파간의 대립 속에서 까말라실라의 압승으로 끝난 이 논쟁의 결말로 인해 이후 계속해서 발전하게 된 티베트 불교의 주류전통에서는 인도불교의 위파사나 점문파 수행이 공인되고 중국선종 돈문파의 영향이 크게 사라진 것에 주목해야 한다. 티베트의 주류전통에서 마하연에 대한 비판은 그의 ‘무관찰, 무작의’설이 결국 위파사나로써의 관찰 작용을 부정하게 된다는데 있다. 심주와 관찰은 해탈적 인식을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심주에 의해 마음의 집중력과 평정이 가능해지며, 이에 의지한 선정의 대상에 대한 관찰이 지속적으로 수행될 때 윤회로부터의 해탈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실상에 대한 여실한 인식은 지관쌍운(止觀雙運)으로써 가능한 것인데 비해 마하연의 ‘무관찰, 무작의’는 육바라밀의 수행 등을 부정하는 단순한 적정주의(寂定主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비판의 요지이다.
​1,200년 전 티베트에서 이미 이와같은 공식적인 논쟁을 통해 우열을 결정지은 역사적 사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 등 극동아시아의 불교 문화권에서는 여전히 이 두 가지 수행체계의 우열이 공론화조차 일어나지 못하는 실상을 바라보며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움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티베트 라사 조캉사원에서 오체투지하는 불자들


​한편, 삼예사의 논쟁을 넓은 의미에서 살펴보면, 불교사상이 가진 철학적이며 분석적인 방식과 선정적이며 직관적인 방식의 두 가지 측면의 조우로 역사적 의미를 새길 수가 있다. 티베트불교의 전승에서 대부분의 학파는 위의 관점에서 마하연의 사상을 비판하고 있긴 하지만 족첸파와 마하무드라를 설하는 까규파 등의 몇몇 문헌에서는 그의 사상적 지향점에 대한 동조를 드러내고 그의 돈문설을 점문파보다 오히려 뛰어난 가르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고 한다. 
부처님 말씀의 90%는 출가한 승려들에게 설파하신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필자가 한 가지 덧붙인다. 미국에 가면 예일대학, 하버드대학, MIT의 젊은 뇌과학자들로 구성된 뉴 잉글랜드 프런티어 사이언스 그룹이 있다. 이 단체에서 2년마다 한 번씩 티베트 정신적인 지도자 달라이라마 스님을 초청하여 온갖 검사를 다 한다. 척추검사, 뇌파검사, 등 온몸을 이 들에게 맡겨 버린다. 사람의 뇌 속에는 아욕(我慾)의 중심(中心)인 ‘’후대상피질’’이 있다. 이 기능이 인간의 온갖 쾌락을 부추긴다. 그런데 달라이라마 스님은 검사 결과 이 후대상피질 자체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이 젊은 뇌과학자들이 인도 다람살라까지 가서 37명의 티베트 스님들의 뇌파를 검사했더니 명상을 할 때나 하지 않을 때나 모든 스님이 후대상피질이 전혀 없었다. 일반인들은 깊은 명상을 해도 후대상피질이 없어지기 쉽지 않다. 승속을 막론하고 수행을 바르게 하면 수행한 경지가 밖으로 나타난다. 사람은 불빛이 있으면 잘 보이고 어두면 안 보이지만 올빼미는 이와 반대다. 업력에 끌려서 그런 것이다. 소납이 한국에서 만난 미얀마 스님 한 분은 불빛이 있으나 어둡거나 걸리지 않고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수행을 제대로 하면 겉으로 나타난다. 그 스님에게는 탐욕, 분노, 교만, 어리석음이 전혀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