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숙성(甘肅省) 둔황(燉煌) 막고굴(莫高窟)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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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성(甘肅省) 둔황(燉煌) 막고굴(莫高窟) (10)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1.0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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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16굴 입구 벽에 만들어진 17굴인 장경동 입구 모습변상도
(사진 1) 16굴 입구 벽에 만들어진 17굴인 장경동 입구 모습변상도

순례자에게 둔황 막고굴은 놀라움과 부러움 그리고 아쉬움의 공간이다. 500여 개에 이르는 석굴이 줄지어 있는 모습과 석굴 안에서 만나는 다양한 불상과 화려한 벽화에 어느 누구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모두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것임을 알게 되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어렵게 찾아온 곳인데 보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보지 못하고 공개되는 굴만, 그것도 비싼 관람료를 내고 봐야 한다는 현실에 아쉬울 수밖에 없다.
오래 전 많은 상인과 순례자들이 오가던 실크로드는 교통의 발달과 청나라 말기 정치 상황이 복잡해지자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에 둔황 막고굴도 인적이 드문 황량한 곳으로 변한다. 그러다 사람들이 어느 한 순간 사람들이 막고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둔황학’이라는 독립된 학문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900년 막고굴의 한 석굴에 살면서 막고굴을 관리하던 왕원록이라는 도사가 우연히 장경동이라 불리는 제17굴을 발견하고서부터이다. 제16굴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 벽 아래쪽에 균열이 난 곳으로 연기가 스며드는 것을 보고 안에 다른 공간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벽 위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 뒤에 석굴이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숨겨져 있던 유물들이 세상에 나오려고 했는지 그렇게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사진 2)  당나라 때 만들어진 17굴 입구 전경
(사진 2) 당나라 때 만들어진 17굴 입구 전경

 

가로 세로 3미터가 채 안 되는 작은 방에는 천장까지 경전, 그림, 고문서, 자수 등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 놀라운 유물들이 발견되자 왕도사는 현청에 보고를 했고, 현청에서는 난주에 있는 감숙성 지방정부에 보고를 했다. 중요한 유물일 것이라고 생각한 난주의 지방관은 모든 유물을 난주로 옮겨 보관하려고 했으나, 당시 감숙 총독은 수천 냥이나 되는 운임 지출을 거부하였다. 결국 지방 정부는 왕도사에게 고서들을 점검하여 석실에 그대로 봉해두라고 명한다. 이후 그것들이 얼마나 귀한 자료인지 그 가치를 알아보고자 여기저기 감정을 의뢰하는 동안, 그 소문은 이곳저곳으로 퍼지게 된다. 
둔황에서 보물 창고가 발견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은 당시 중국에 들어와 있던 유럽과 일본 탐험대에게 전해진다. 그들 중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영국의 탐험대장 오렐 스타인(1862~1943)이었다. 

(사진 3) 17굴 홍변대사상과 비석
(사진 3) 17굴 홍변대사상과 비석

 

그는 1907년 3월 둔황에 도착한 후 왕도사를 설득하여 29개의 상자에 서적과 그림, 자수 등을 잔뜩 넣고 의기양양하게 런던으로 갔다. 그 다음해에는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동양학자인 펠리오(1878~1945)가 와서 왕도사에게 500냥의 은자를 주고 유물들을 사서 프랑스로 반출하였다. 이후 독일, 러시아 및 일본 탐험대도 둔황으로 왔고, 장경동의 남은 유물들을 얻어 자신들의 국가로 가져갔다. 왕원록이 쓴〈왕도사천소(王道士荐疏)〉에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현재 둔황 천불도 주지인 왕원록이 삼가 머리를 조아려 고합니다. 제가 있는 천불동에는 진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는데, 불사에 참배하고 가까이에서 불상들을 보니 매우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저는 이들을 보수하기를 서원하여 모금하였습니다. 
광서 26(1900)년 5월 26일 이른 새벽, 하늘이 진동하면서 산에 균열이 생겨 일꾼들과 함께 괭이로 파보았더니, 새로운 석굴이 드러났는데 안에는 대중 5(851)년의 연호가 새겨진 석비와 오래된 경전 만 여권이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온 펠리오와 스타인이 둔황에 왔다가 불경을 청해 가지고 갔습니다. (하략) 

(사진 4) 17굴의 주인공인 홍변대사상
(사진 4) 17굴의 주인공인 홍변대사상

 

또한 1906년에 쓰인 <중수천불동삼층루공덕비기(重修千佛洞三層樓功德碑記)>에도 이 장경동이 발견된 경위를 적고 있다. 내용은 둔황 천불동이 만들어지고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돌보지 못하자 불상도 파괴되고 계단도 끊어져 안타까웠는데 여러 사람들이 자금을 모아 수리를 했다는 것이다. 
이후 경자년(1900년) 이른 여름에 왕원록이 석굴에서 모래를 걷어내다 벽화가 그려진 벽 안에서 불경으로 가득 채워진 또 다른 석굴을 발견했는데, 왕원록이 의로운 뜻으로 벽화를 깨어 천여 년 간 버려졌던 유물을 처음 보게 하였다는 내용(사진 1)을 담고 있다. 
둔황 장경동은 120년 전 왕도사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천여 년 넘는 동안 온갖 유물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크기도 작지만 굴 안쪽의 사각형 기단에 단아한 승려 한 분이 앉아 있고, 벽화와 작은 비석만 있을 뿐 아주 단출하다(사진 2). 원래 이런 모습이었는데 엄청난 유물이 여기서 쏟아져 나왔으니 마치 처음부터 보물창고였던 것처럼 여겨져 원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사진 5) 홍변대사상 왼쪽에 그려진 나무와 승려 모습
(사진 5) 홍변대사상 왼쪽에 그려진 나무와 승려 모습

 

석실 서쪽 벽에 있는 높이 1.5미터, 넓이 70센티미터의 비석은 홍변고신칙첩비(洪辯告身敕牒碑)이다(사진3). 이 비의 내용에 따르면 이 장경동의 주인공은 대중 5년(851) 칙명으로 ‘하서석문도승통지사주승정법률삼학교주(河西釋門都僧統知沙州僧政法律三學敎主)’를 제수 받은 홍변으로 굴 안에 단아하게 앉아 있는 인물이다. 반쯤 감은 눈과 굳게 다문 얼굴, 거기에 살짝 미소를 짓는 모습에서 생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사진4). 
뒷벽에는 두 그루의 나무와 두 사람이 그려졌다. 홍변대사의 왼쪽에는 둥근 부채를 들고 있는 비구와 정병이 걸려있는 나무가(사진5), 오른쪽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여인과 행낭이 걸려 있는 나무(사진6)가 묘사되었다. 행낭과 정병은 아마도 주인공과 관련된 물건이고, 두 인물은 홍변을 가까이서 모셨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부처님 옆에 협시보살이 서있는 것과 같은 삼존불 형상인데, 홍변이 도승통으로 당시 하서 지역의 승려들 중 가장 높은 사람이어서 삼존불처럼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진6) 홍변대사상 오른쪽에 그려진 나무와 여인상
(사진6) 홍변대사상 오른쪽에 그려진 나무와 여인상

 

둔황연구소의 조사에서는 상 뒷면에 복장구에 골사리가 납입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흙으로 빚은 나한상은 결국 홍변대사의 진신이나 다름이 없다. 어쩌면 홍변대사가 수행하는 공간 또는 그를 기리기 위한 공간에 온갖 서적과 두루마리, 그림으로 꽉 채워져 넣었으니, 대사께서 갑갑해서 보물들을 세상에 내보낸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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