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기형도 (1960 ~ 1989)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시인은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에서 태어났다. 1980년 연세대 교내 문학 서클〈연세문학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시작했다. 그 때 필화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1985년 시 ‘안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등단했다. 중앙일보 기자로 근무하면서 어느 날 심야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뇌졸중으로 애석하게도 젊은 나이에 이승을 떴다. 2017년 광명시에 기형도 문학관이 개장됐다.
윗 시의 화자는 사랑을 잃고,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사랑했던 대상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잘 있거라.’를 반복하는 것은 사랑의 추억들이 온전하게 잘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사랑을 상실한 화자는 장님이 된 것처럼 사랑의 대상이 된 것들을 빈집에 두고 문을 잠근다. 그래서 모든 것은 빈집에 갇혔다. 사랑을 잃은 한 남자의 허전함이 짙게 느껴지는 시다. 시적 몽상의 극치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장석주는 기형도 시인을 도저한 검은 허무주의의 젊은 사제라고 칭하기도 했다. (오영호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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