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 칼럼 - 모두가 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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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 칼럼 - 모두가 보살이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1.1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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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슈나의 입 (알바 란 카브레라)
크리슈나의 입 (알바 란 카브레라)

불자(佛者)들이 불·법·승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까닭은 이윽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신념과 약속 때문이다. 불교의 핵심은 깨달음의 약속인 것이다. 불교의 수행은 그래서 법을 비추는 밝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며, 불교를 구성하는 전통에서 발전된 다양한 신행과 관행은 모두 그 약속을 담보하는 필수적인 방식이다. 
칠백만년전 지구상에 등장한 인류가 역사 속에서 2천6백년 전 붓다가 출현하면서 이 지구에서의 삶의 투쟁과 고통에 대한 해법으로, 그리고 이 지구별의 숨 막히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이 진리의 빛을 승가에서 승가로, 도반에서 도반에게로, 세대를 이어 전달하면서 깨달음의 전통을 전해 왔다. 
그러나 불교를 유심론과 관념론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깨달음에 대해 일부 집단의 부분적 전승으로 치부하기도 하는 등, 불교적 수행과 방법론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도 많다. 근세 이후의 과학기술의 발달과 자본주의를 통한 물질중심주의는 사실 유물론자들보다 훨씬 더 물신숭배에 젖어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자유주의자라고 강변한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지 의아한 면도 많은데. 
깨달음은 원대한 자유다. 그 길을 가는 수행과 승가 제도와 계율을 속박이라고 생각하는 불자들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여전히 불교는 어렵고 소수의 특별한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일반인들에게는 강하다. ‘깨달음’을 우리와는 거리가 멀고, 특정한 길을 지향하는 ‘수행자’들의 영역으로 보기도 한다.  
최근에는 한국불교 신행문화의 문제점을 ‘기복불교’의 폐해만큼 ‘교리불교’의 박제성에서 찾는 경향이 늘고 있다. 불교를 일종의 지식과 철학으로 접근해서 ‘종교적 감성’과 깨달음에 대한 개선과 변화의 힘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지식불교’는 그래서 알음알이의 많고 적음에 따른 힘겨루기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깨달음에 대한 많은 지식이 깨달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은 산사의 선방(禪房)이나 보드가야의 보리수, 혹은 미얀마 명상센터의 특정한 시공(時空)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의 지혜를 만나는 곳, 매일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은 특정한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깨달음은 우리의 진정한 본성과 우리의 집이지만 삶의 복잡성이 그 본성을 잊게 만든다. 그 망각은 망명자처럼 느껴지며 우리는 그 황폐함을 방어하기 위해 습관, 신념, 전략의 정교한 구조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 진정한 모습을 떠나 그러한 망명자의 환상에 젖어 있는 이 고통의 그물로 지은 구조물들은 어떻게 해체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마구잡이로 사는 것처럼 보여도 마음속에서 끌어당기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수많은 인생의 골곡을 도대체 알 수없는 어떤 힘에 의해 참으로 잘도 운행되어 왔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우리를 밀어 붙이는 무언가가 있고 우리를 귀향으로 이끄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고통과 우리 주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고통이 압박을 가해오지만, 우리는 삶을 경험하는 일반적인 자기 지향적 방식보다 더 크고 진실한 어떤 이끌림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있다. 그러한 ‘암시’는 단지 ‘우연한 느낌’이 아니라 평생 동안 집요하게 우리 주변을 맴돈다. 
‘깨달음’은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과정이다. 암시를 단순히 우연의 문제가 아니라 쉽고 일관되게 제시하는 ‘감동’과 ‘은총’의 페이소스로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식불교를 앞세운 우리의 말의 성찬을 잠시 멈추어야한다.
‘깨달음’이라는 용어는 ‘구경각(究竟覺)’, 묘각지(妙覺地), 적멸심(寂滅心), 대보리(大菩提),  마하반야(摩訶般若) 등으로 표기된다. 
‘깨달음’은 원래 ‘보리(bodhi)’에서 나온 말인데, 19세기 불교 경전 번역가들이 보리를 깨달음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보리는 팔리어 동사 ‘부드흐(budh)’에서 나온 말로 ‘깨어난다(to awaken)’는 뜻이다. 그러므로 보리를 직역하면 ‘깨어남(awakening)’에 더 가깝다. 게다가 사람들은 깨달음을 모든 문제와 잘못이 사라져 축복만 넘치는 편안한 상태로 보고, 따라서 완벽한 상태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깨달음’을 마치 안정된 상태, 시간과 공간, 인간의 변덕스러움에 종속되지 않으며, 절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고, 일단 그 임계점을 넘으면 되돌아 갈 수 없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적(靜寂)’과는 거리가 멀다. 불교 용어로 말하면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깨달음이고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경험도 동일한 깨달음이다. 그것은 우주 자체의 광대하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본질이며, 우리가 우리로 나타나는 광대한 깨달음을 인식하고 참여할 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들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평범한 존재 방식을 결코 초월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상존한다. 이 모두가 ‘모든 삶’인 것이다. 고통과 기쁨 모두 받아들이면, 삶은 조각난 어둠이 아니라 총체적 치유에 이른다. 나락이라고 생각했던 절망은 사실 ‘부분’이라는 깨달음의 요소일 뿐이다. 
‘깨달음’이란 ‘깨어나기’, 즉 과정의 일부이며, 불멸의 그 어떤 신비함이 아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종종 실망 속에 전개되는 것처럼 보여도 자신의 본질을 보고, 정화되고 완전 해지는 감정, 지혜의 눈을 열고, 깨어있음을 느끼는 것이 삶의 각성이다. 
‘깨달음’은 어디에나, 어떤 삶에나 깃든 은총이고, 깨어남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불교사상가인 ‘용수’보살은 “부처님이 나타나지 않고, 추종자들이 사라지면, 깨어남의 지혜는 저절로 터져 나온다“고 지적했다. 
우리 주변에는 ‘깨쳐가는’ 보살들로 가득하다. 일상적인 깨달음의 실천에서 하루에도 우리는 수백 명의 보살을 만난다. 주변을 살펴보라. 모두가 최선을 다해 삶을 가꾸고 있다. 그 놀라운 각성이 모든 삶의 도전 속에서 반짝일 때, 그들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친절과 격려로 진리의 길을 향한 여정의 빛이 감동처럼 빛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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