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신문 31주년 특별기획“제주 절오백”- 깨달음의 수행처 보리도량, 선래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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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신문 31주년 특별기획“제주 절오백”- 깨달음의 수행처 보리도량, 선래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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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1.1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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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爲하지 않고 쉼에서 생겨나는 성찰의 기회 갖기를”
선래왓의 독특한 중정
선래왓의 독특한 중정

 

동부산업도로에는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거문 오름을 지나 우회전해서 선흘 2리로 들어섰는데, 사찰이 보이지 않았다. 아차 싶어 차를 돌려,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서는 일반 가정집이 아닌 건물을 찾았다. 제주 현무암으로 외벽을 두른,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겨 나오는 건물이 눈에 띄었다. 차를 세우고,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안쪽을 살펴보았다. 눈으로 뒤덮인 마당 한 켠 푸른 소나무 아래 푸른 청동의 미륵반가사유상. 그제야 제대로 찾아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마당 한켠의 미륵반가사유상
마당 한켠의 미륵반가사유상

선래왓, 일반적이지 않은 이름이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가게 했던 이름이기도 하다. 왓은 제주말로 밭[전(田)]이라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앙코르왓(angkorwat)’이라고 할 때의 그 ‘왓(wat)’으로도 읽을 수 있다했다. 이 때의 ‘왓’은 사원(寺院)이라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선래(善來)라는 말은 ‘잘 왔다’는 인사말, 부처님 제세 시 부처님이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잘 왔다. 내 제자여[善來比丘]”라고 맞이하곤 했다한다. 스님(인현 오성 스님)은 사찰 이름에 중의적 의미까지 담아 넣었다.
사각의 옹벽 입구, 사천왕문이 있어야할 자리에는 나무로 짜인 대문이 방문객을 맞아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짓말같이 작은 연못을 갖춘 중정(中庭)이 툭 튀어나왔다. 선흘은 예로부터 눈으로 유명한 동네였는데, 마침 중정으로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 낯선 풍경에 잠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중정 연못에도 두텁게 눈이 내려 앉아있었는데, 그 풍경 속에서는 시간도 나풀나풀 내리는듯했다.

본존불과 후불탱화
본존불과 후불탱화

 

1층은 요사채 개념이었고, 법당은 2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중정을 지나 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아차하면 발을 헛디딜 정도로 어두웠다. 스님은 부처님을 뵈러 올라가는 길이어서, 특별히 한 걸음 한 걸음 집중하라고 일부러 창을 내지 않고 풍광을 감추어 버렸다고 했다. 2층에 올라서자, 옹벽의 한쪽 면만을 터 바깥 풍경을 사찰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평펑 내리는 눈과 선흘의 풍경이 2층 중정으로 내리고 있었다. 두텁게 쌓인 눈 위로는 큼지막한 새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마 중정 연못의 물고기를 탐하고 날아왔던 것이겠다. 스님은 전에는 왜가리가 들락거리더니 요즘은 백로가 자주 날아든다 했다.

후불탱화에는 제주불교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후불탱화에는 제주불교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담한 크기의 본존불 뒤, 후불탱화 역시 일반적이지 않았다. 선래왓의 후불탱화는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었기에 삼배를 마치고, 카메라 조리개를 활짝 열고 후불탱화로 바짝 다가섰다. 후불탱화 전체가 제주도라는 공간을 담아, 해가 뜨는 동쪽에는 성산 일출봉의 풍경과 동자복이, 해가 지는 서쪽에는 산방굴사와 서자복이 담겨 있었다. 선래왓의 탱화는 전통적인 탱화 형식을 기본 바탕으로 제주불교의 역사와 민간신앙 등을 모조리 담아내고 있었고 팔상성도를 기본 주제로 부처님이 제주에 나투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염원이 읽혔다. 

눈에 덮인 선래왓 전경
눈에 덮인 선래왓 전경

 

특히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이나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은 법고창신(法古蒼新)이라고나 해야 할까? 부처님을 조선의 세자로 설정해 그 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해냈고, 법화사나 수정사, 그리고 묘련사와 원당사지 석탑 등 제주 불교의 상징적인 코드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목에 염주를 걸고 좌선하는 자세로 등장하는 처사(處士) 그림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 불교의 정맥이 끊긴 상황에서도 제주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재가자를 표현한 것이라 했다. 또한 근대 제주 불교의 큰 굴곡이었던 4.3에서부터 봉려관 스님을 비롯한 제주불교를 위해 헌신한 비구니 스님들까지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오성 스님은 조계종 원로의원이자 대종사이신 우경 스님(관음사 회주)의 상좌이다. 스님은 해인사 강원에서 5년, 실상사 화엄학림에서 2년가량을 배우고, 제주로 내려와 김녕의 백련사 주지로 주석했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포교와 불교대학, 그리고 제주 불교사 정리까지 바빴다. 그러면서도 정리한 내용을 가지고 학술세미나를 열고 제주를 떠나 해인사나 법주사 출강까지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고, 2000년경부터 조금씩 불사를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고 했다. 낯선 건축양식으로부터 사찰의 모든 내용을 현대적으로 변용해낼 수 있었던 배경이 궁금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사문유관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사문유관도

 

스님의 답변은 두루뭉술했다. 배경만 스윽 그어 보여주곤 그것으로 끝이었다. 실상사에서 도법 스님과 연관 스님을 모시고 불교의 세계관을 담아냈다고 평가받는 화엄경을 배우며 그 때 세상을 보는 눈과 시대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었노라고. 
앞으로 선래왓을 어떤 사찰로 꾸려나가실지, 공부 모임이 있는지 등 몇 가지를 여쭈었다. 스님은 ‘남들도 다 하는데, 굳이 나까지’라며 웃고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기자가 침묵 속에서 한참을 버티자, “작위를 하지 않으렵니다. 형식을 만들어버리면 익숙하고 편하긴 하겠지만 고착이 되어 버리기 쉽거든요. 그저 사람들이 이곳에 와 편하게 머물면서 주변의 오름에도 오르면서, 쉼에서 생겨나는 성찰의 기회를 가져보기 바라는 거죠. 성찰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나 힘을 얻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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