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밖의 세상 (17) - 죽음에게 말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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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밖의 세상 (17) - 죽음에게 말걸기
  • 박인수 _ 자유기고가(비정규직 노동자)
  • 승인 2021.01.20 14: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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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저는 스스로에게 언제나 가장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죽음 말이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은 우리 인생의 참된 최종 목적이에요. 그래서 저는 지난 몇 년 이래로 이 인간에게 진실된 최고의 친구와 서로 잘 사귀어왔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의 모습은 더 이상 저에게는 겁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평화를 주고 위로를 준답니다.” 

위 글은 모짜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편지에서 밝히고 있듯 모짜르트는 죽음을 벗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음악을 한번이라도 들어 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사실이다. 그의 음악이 내뿜는 현란함과 천진난만함 속에 이렇듯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배어 있었다니!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죽음은 우리에게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너무 염세적인가? 그렇지 않다. 이 말의 참뜻은 날마다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에 다가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도 않을뿐더러 자기 삶에 그만큼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모짜르트는 죽음에 대해 사색하듯 삶을 성찰했던 것이다. 그의 음악에 나타나는 천진난만함은 죽음을 사색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고귀함이다. 윤동주가 그랬고, 천상병이 그랬다. 
만약 앞으로 1년밖에 살지 못한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아마 대부분은 지금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돈이나 명예, 공부, 성적 따위 들을 과감히 팽개치고 비로소 자기 삶을 찾으러 자신에게로 떠날 것이다.『월든 Walden』의 저자 헨리 데이비 소로우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부와 명예를 좇는 직업 대신 삶을 주체적으로 살며 삶의 참된 의미를 직접 경험해 보기 위해 월든 호숫가의 숲으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부와 명예를 좇는 건 의미 있는 일이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 보고 삶의 참된 의미를 직접 경험해 보는 건 헛된 일일 터다. 그러나 남은 삶이 1년밖에 되지 않는다면?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모두는 아닐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남은 1년만큼은 참된 삶을 찾으려고 애쓸 것이다. 도정일 교수는 자본주의적 일상의 반복성은 “‘죽음’을 가리고 ‘죽음의 공포’를 눌러준다는 데” 가장 큰 힘이 있다고 갈파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가리고 있는 삶을 창조적으로 누리지 못한다. 삶을 창조적으로 살지 못함으로써 죽음 또한 창조적으로 맞이하지 못하고 두려움 속에서 지배당하기 일쑤다. 

뭉크의 목판화 [두 여인]. “워낙 삶과 죽음은 이 [두 여인]처럼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무릇 물깃에 피어난 두 꽃처럼…….”(김열규, 「人間的인 죽음의 原像」에서)
뭉크의 목판화 [두 여인]. “워낙 삶과 죽음은 이 [두 여인]처럼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무릇 물깃에 피어난 두 꽃처럼…….”(김열규, 「人間的인 죽음의 原像」에서)

 

죽음은 우리 삶의 바로 뒷면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대개는 삶에서 죽음으로 일방 통행적인 삶을 산다. 우리가 오르페우스나 바리데기가 아닌 이상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쌍방 통행적인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래서 고 김열규 교수는 말한다. “인간에 주어진 삶과 죽음 사이의 일방 통행로를 트게 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영원한 과제다. 생과 사가 지닌 대립의 조정(調停)은 허망한 듯한 꿈인데도 인간은 집요하게 그 꿈에 도전한 것이다.”
삶과 죽음이 지닌 대립의 조정의 정점에 오른 이가 바로 고타마 싯다르타라 할 수 있다. 그가 도달해서 부처가 된 정점, 곧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은 결국 생사고락(生死苦樂)의 끊임없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감안할 때, 살면서 죽음을 사색하는 행위는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길일 수 있다.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그리스도를 본받자’는 책이라는『준주성범』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죽음의 때에 찾고자 하는 삶의 모습대로 지금 살려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며 슬기로운가.” 그렇다. 죽음의 때에 내 모습이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 다다랐다면, 한 세상 잘 산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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