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26) - 감숙성(甘肅省) 둔황(燉煌) 유림굴(楡林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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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26) - 감숙성(甘肅省) 둔황(燉煌) 유림굴(楡林窟)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1.2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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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유림굴 전경, 계곡 동쪽에 31개, 서쪽에 11개의 굴이 만들어졌는데, 동쪽 석굴들 중 일부만 개방되었다.
(사진 1) 유림굴 전경, 계곡 동쪽에 31개, 서쪽에 11개의 굴이 만들어졌는데, 동쪽 석굴들 중 일부만 개방되었다.

 

『삼국유사』권 제4 의해(義解)편에 전하는 원효대사 이야기에서 원효대사가 거리에서 “자루 없는 도끼를 누가 내 맞출 것인가? 하늘 고일 기둥을 찍을 터인데!”라고 외쳤는데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임금인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그 말이 귀한 집 딸을 얻어 나라에 큰 인물

(사진 2)  유림굴 제 2굴에 그려진 미륵경변상도의 미륵불 모습 (부분)
(사진 2) 유림굴 제 2굴에 그려진 미륵경변상도의 미륵불 모습 (부분)

이 될 자식을 낳으려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요석궁에 있는 혼자된 공주와 연결해주려고 했다. 임금의 명을 받고 대사를 찾던 관리가 원효대사를 다리 위에서 만났는데, 대사는 일부러 다리에서 떨어져 홀랑 젖는다. 관리는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대사를 궁으로 모셨고, 대사가 궁에서 며칠 머물렀는데 얼마 후 공주에게서 태기가 있었고 후에 이두를 만든 설총을 낳았다. 이 이야기에서 원효대사가 떨어진 다리 이름이 유교(楡橋)라고 전하는데, ‘유(楡)’자가 느릅나무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 다리가 느릅나무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느릅나무는 단단해서 예로부터 목재로 많이 사용했고, 뿌리껍질인 ‘유근피’는 배설을 도와주고 불면증에도 좋다고 한다. 느릅나무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잘 자란다.
둔황석굴이라 하면 막고굴을 떠올리지만 막고굴 외에 인근에 있는 동천불동, 서천불동과 유림굴(楡林窟)까지 포함하는 명칭이다. 막고굴을 제외한 나머지 굴들은 규모나 다양성 면에서 막고굴과 비교할 수 없다. 규모가 작다고 해서 보잘 것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아마 그 석굴들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OO석굴 관광지로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이 세 석굴군 중 막고굴 외에 우리나라 순례자들이 가끔 들리는 곳이 안서 유림굴이다. 막고굴과 동, 서천불동은 사주(沙州)라 불렸던 둔황군에 위치한 반면 유림굴은 과주(瓜州)라 불리던 안서에 위치해 있다. 막고굴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 거리이니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유림굴의 ‘유(楡)’자는 느릅나무를 가리키는 글자다. 사막을 뚝 잘라내어 만들어진 것 같은 계곡 가운데를 흐르는 하천가에는 작은 숲이 만들어졌는데 그 숲을 채운 나무가 바로 느릅나무이다. 먼 옛날 원효대사가 떨어졌던 느릅나무로 만든 다리를 유교라 한 것처럼 이 느릅나무 숲에 만들어진 석굴을 유림굴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사진 3)  유림굴 제2굴 출입구 남벽에 그려진 수월관음도, 고려불화와 아주 유사하다.
(사진 3) 유림굴 제2굴 출입구 남벽에 그려진 수월관음도, 고려불화와 아주 유사하다.

 

 
유림굴(사진1)이 정확히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현재 가장 오래된 석굴은 당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어서 그때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이후 오대, 송, 서하 지배

(사진 4) 유림굴 제3굴, 서하시대에 그려진 보현보살변상도, 필선이 아주 유려하다.
(사진 4) 유림굴 제3굴, 서하시대에 그려진 보현보살변상도, 필선이 아주 유려하다.

기, 원나라를 거쳐 청나라 때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고, 보수되었다. 동쪽 절벽에 31개, 서쪽 절벽에 11개의 굴이 있는데, 특히 914년부터 1036년 서하가 침공하여 멸망할 때까지 둔황 지역을 다스렸던 조씨 일가의 지배 기간에 많은 굴들이 조성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굴에는 색채가 화려한 불화가 많이 그려졌다. 
당나라 중기에 만들어진 25굴에는 <관무량수경변상도(觀無量壽經變相圖)>와 <미륵경변상도(彌勒經變相圖>(사진2)가 그려졌는데, 미륵경변상도의 경우 안타깝게도 중앙의 미륵불과 협시보살의 일부 채색이 벗겨졌지만 전체 구도와 색채 및 표현이 막고굴에 그려진 벽화와 큰 차이는 없다.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기 때문에 동일한 화원들이 참여해 그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둔황을 조씨 일가가 지배하던 시기, 서쪽에서 강성해진 서하가 침공해 둔황을 지배하는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제 2굴에는 다양한 벽화가 그려졌다. 동쪽 벽에는 열반도, 남쪽 벽에는 설법도가, 출입구인 서쪽 양 벽에는 수월관음도가 그려졌다. 출입구를 향해 왼쪽에 그려진 〈수월관음도〉(사진 3)는 중앙에 커다란 원광 안에 편안한 자세로 앉은 관음보살을 배치하고, 등 뒤에는 대나무와 괴석을, 옆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을 표현하였다. 바위 너머로는 청색과 검은 색의 새 두 마리가 날고 있다. 관음보살 앞에는 일반적으로 표현되는 선재동자 대신 공양자를 배치하였지만 이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구성이 고려시대 때 그려진 수월관음도와 아주 유사하다. 아마 시기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유사성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5) 유림굴 제3굴 보현보살변상도 왼쪽 가장자리에 그려진 현장취경도
(사진 5) 유림굴 제3굴 보현보살변상도 왼쪽 가장자리에 그려진 현장취경도

제3굴에는 꾸불꾸불한 구름으로 둘러싸인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과 그 권속들을 그린 보현보살도(사진4)가 그려졌다. 수묵담채의 생생한 인물 표현, 섬세한 옷주름, 시원한 구성 및 윗부분에 그려진 송나라 시대의 산수화를 보는듯한 산수화와 건물 모습에서 다른 굴에 그려진 벽화와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보현보살의 오른편에 그려진 바위 위에는 말에다 경전을 싣고 손오공과 함께 천축을 다녀오는 현장대사(602~664)를 그린〈현장취경도〉(사진5)가 그려졌다. 명나라 때 널리 유행한 『서유기』가 알려지기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유림굴에 그려진 6폭의 현장취경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동천불동에도 이 현장취경도가 그려졌는데, 이처럼 이 주제의 그림이 이곳에서 많이 그려진 이유로 서하인들이 현장대사를 각별히 존경하였고, 그가 쓴 <대당서역기>에 근거해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제3굴에는〈팔대영탑변상도〉(사진6)도 그려졌는데, 이 그림은 구법승들에 의해 알려진 인도의 팔대 불교성지에 대한 관심이 거기에 세워진 팔대영탑으로 변하여 나타난 것이다. 막고굴 76굴에 그려진 〈팔대영탑변상도〉가 여덟 폭으로 그려진 반면 유림굴에서는 한 화면에 하나의 탑을 크게 배치하고 그 주변에 나머지 탑을 작게 그린 형식을 취했다. 항마성도탑을 중심에 두고 위에는 열반탑을, 오른쪽에 탄생, 대신통, 도리천강하 장면을, 왼쪽에는 초전법륜, 원후봉밀, 취상조복 장면을 배치했다. 이 여덟 장면은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른 인도에서 유행한 팔상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팔대영탑변상도〉는 실제로 가기 힘든 성지순례 대신 그림을 그려 팔대영탑을 공양함으로써 순례하는 공덕을 쌓으려 한 것이다.

(사진6) 유림굴 제3굴에 그려진 팔대영탑변상도
(사진6) 유림굴 제3굴에 그려진 팔대영탑변상도

 

둔황에 직접 가지 못 한다면 둔황석굴에 있는 불상과 그림을 보면서 공양하면 이 팔대영탑변상도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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