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27) - 신강 위구르자치구 투르판 베제클릭(柏孜克里克)사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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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27) - 신강 위구르자치구 투르판 베제클릭(柏孜克里克)사원 (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2.0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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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투르판 인근의 화염산변상도
(사진 1) 투르판 인근의 화염산변상도

 

중국에서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은 뱃길과 육로가 있다. 둘 다 어려운 여정이지만 예기치 못한 폭풍을 만나지만 않는다면 뱃길이 육로보다 더 빠르고 안전하였다. 인도를 다녀온 뒤 순례기를 남긴 법현, 현장, 혜초 세 분 중 법현과 혜초 스님은 육로와 해로를 모두 이용하였고, 현장 스님은 육로로만 다녀왔다.   『서유기』의 삼장법사의 모델인 현장 스님이 인도를 향해 출발한 해는 629년으로,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당나라가 그 힘을 옥문관 너머로 떨치기 전이었다. 그래서 옥문관 너머 서쪽에는 작은 나라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현장 스님도 옥문관 인근의 국경을 넘을 때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현장은 공식적으로 여행  허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대놓고 도움을 청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감숙성에서 천수, 난주를 거쳐 옥문관까지 왔는데 도중에 도움을 준 관리들도 돌아가든가 둔황으로 가기를 권했으나, 죽더라도 인도로 가야겠다는 염원으로 사막을 가로질렀다. 이후에도 난관이 많았지만 처음 맞닥뜨린 어려움이어서 그 고통은 더 컸을 것이다.『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는 당시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법사는 4일 밤, 5일 낮 동안 입에 물 한 방울도 적시지 못해 목구멍과 배가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거의 절명 상태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모래 위에 누워 사경을 헤맸지만, 그런데도 잊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기도했다. 
“현장의 이 여행은 이익을 구함도 아니며 명예를 바라서도 아닙니다. 단지 위없는 정법을 구하려고 가는 것일 뿐입니다. 우러러 생각컨대 보살께서는 자비로우신 생각으로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원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괴로워하는 사람을 어째서 모른 채 하십니까?” 

(사진 2)  베제클릭사원의 특징적인 벽화인 위구르 왕조 때 그려진 서원도
(사진 2) 베제클릭사원의 특징적인 벽화인 위구르 왕조 때 그려진 서원도

현장이 마지막 힘을 내어 나가다 만난 오아시스가 지금의 투르판 지역인 고창(古昌)이었다. 위그르어로 ‘풍요로운 곳’이라는 투르판은 사방이 높은 산들로 에워싸인 사막 속 작은 분지이다. 천산산맥에서 눈 녹은 물이 흘러들지만 높은 산으로 에워싸여 있고 고도가 낮아 여름 한낮에는 야외에서 생활하기 어려울 정도로 더운 곳이다.『서유기』에 인도로 가던 삼장법사가 거대한 화염산(사진 1)을 만나자 손오공이 파초선을 빌려와서 불을 껐다는 얘기가 만들어진 바로 그곳이다.  
현장이 들렸던 당시 고창국의 왕은 국문태(麴文泰, 재위 620-640)로 신심이 매우 깊었다. 당나라에서 온 현장을 맞이하여 자신의 나라에 머물며 불법을 가르쳐주기를 간청한다. 하지만 현장은 자신의 세운 서원을 얘기하며 완곡히 거절했다. 왕은 그렇다면 한 달 간 머물며 인왕경 강론을 청했고, 현장이 떠날 때는 가는 도중에 있는 나라의 왕들에게 편지와 선물을 준비하여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게 조치하였다. 10여 년 후 현장이 불경을 구하고 당나라로 귀국할 때 고창국에 들려 이전의 고마움에 인사하려 하였으나 운명의 장난인지 고창국은 몇 년 전 자신의 모국인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음을 알게 된다. 
 907년 당나라가 멸망한 후 투르판 지역에는 위구르족 왕국이 세워진다. 둔황 지역이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투르판 지역은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후에 거란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될 때까지 주변 국가들로부터 독자적인 국가로 인정받는다. 이 위구르 왕가가 정성 들여 만든 불교 사원이 베제클릭(Bezeklik) 천불동이다. 베제클릭이란 위구르 말로 ‘아름답게 장식된 곳’이라는 의미이다. 
위구르 왕족들은 투르판에서 동쪽으로 약 40㎞ 떨어진 무르툭(木頭溝)강 계곡 절벽에 석굴을 파고 그 벽에 자신들의 염원을 담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벽화를 그리게 했다. 현재 80여 개의 굴이 있는데 벽화가 있는 굴은 40여 개이다. 현장이 들렸던 고창국 시대 때부터 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때 그려진 벽화는 확인되지 않고 대부분 위구르 왕국이 번창하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이들이 그린 벽화 중 가장 특이하고 아름다운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생 이야기를 소재로 한 서원도(誓願畵, 사진 2)라고 불리는 그림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생에 여러 신분일 때 과거의 부처님께 공양하고 서원을 올린 공덕으로 미래에 부처님이 된다는 수기를 받는 내용을 그린 것이다.『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藥事)』중 15개의 게를 도해

(사진 3)  베제클릭 사원에 남은 벽화 중 위구르 왕족의 모습
(사진 3) 베제클릭 사원에 남은 벽화 중 위구르 왕족의 모습

 

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 중앙에 3미터에 가까운 커다란 부처님을 그리고 그 주위에 보살, 천부 및 다양한 공양자들(사진 3)을 배치한 구도로 그려졌다. 천 년 가까이 된 이 그림들은 안타깝게도 베제클릭사원 현장에서 온전히 볼 수 없다. 석굴 보호 차원에서 개방하는 굴이 제한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아름다운 벽화가 20세기 초 베제클릭에 밀어닥친 탐험대라는 이름의 약탈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도려졌기 때문이다. 둔황 장경동에서 많은 유물들을 영국으로 가져간 스타인은 물론 일본의 오타니와 러시아 탐험대도 베제크릭에 들렸다. 여러 탐험대 중 베제클릭에 가장 치명적이었던 탐험대는 독일 탐험대로 그 대장인 르콕은 베제클릭 사원의 벽화를 뜯어내 독일로 갖고 가는 것이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들 탐험대들을 비판하는 책인『실크로드의 악마들』에 쓰인 르콕이 발굴할 당시의 상황을 빌면 다음과 같다.
수 세기 이상 계곡을 타고 흘러내린 모래들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가득 메워 사람들이 들어가 살 수 없게 봉쇄돼 있었다. 가장 커 보이는 굴로 들어가기 위해 발을 떼자마자 모래 사태가 시작됐다. 그런데 갑자기 마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내 좌우로 드러난 벽 위에 이제 막 화가가 붓질을 끝낸 것 같은 생생한 그림이 나타났다. 이 벽화를 안전하게 가져갈 수만 있다면 탐험의 성공은 확실하다. 

르콕은 오랜 시간 힘들여 작업한 끝에 벽화를 모두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들은 20개월만에 무사히 베를린에 도착했다. 박물관에 그 벽화들로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그 방은 모든 벽화가 완벽히 옮겨온 하나의 작은 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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