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14] - 관나암과 영천사 폐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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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14] - 관나암과 영천사 폐사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2.1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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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나암(觀儺岩)과 영천사터(靈泉寺址) 위치는 서귀포시 상효동 1605번지 일대로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 맞은편 상효교(上孝橋) 아래로 500m 정도 거리에 영천천(靈泉川)[지금의 효돈천] 서쪽 둔덕에 있다. 이곳 냇가의 큰 바위(높이 약 2.5m)에 해서체로 觀儺岩(관나암)이라 새겨져 있다. 글씨의 크기는 가로 세로 10cm 정도이다. 누가 어느 때 새겼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글자가 새겨진 바위의 벽면이 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등지고 있어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목사 이원조(李源祚)가 저술한 탐라지초본(1843년)에 의하면, 〈영천천 냇가 큰 바위에 관나암(觀儺岩)이라는 석 자가 새겨져 있다. 옛날 영천사의 스님이 새긴 것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관나암이란 나례(儺禮)를 구경하는 바위라는 뜻이다. 오문복 선생은 관나암이 영천관에서 영천사 쪽의 나례(儺禮)를 구경하였던 장소가 분명하다고 했다.
나례는 역귀 즉 돌림병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굿)이다. 나례라는 것은 고려시대 때 중국에서 건너온 풍습이다. 섣달 그믐날 각 가정에서 부뚜막의 헌 곳을 새로 바르고, 거름을 치워내고, 가축우리를 치워 새로 짚을 넣어 깔아주며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돈을 하고, 한밤중에 마당에 불을 피우고 북을 치거나 폭죽을 터뜨려 집안에 있는 잡귀를 몰아내고 깨끗하게 새해를 맞이하던 풍습으로, 궁중에서는 대궐 안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한편,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나례 의식을 거행하였다고 한다.

로천 김대규화백
로천 김대규화백

조선시대 궁중에는 나례도감이 있었으나 지방의 나례에 대한 기록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주목 관덕정 앞에서 행해지던 입춘굿은 나례의 일종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제주목에 나례와 유사한 굿이 있었으니 정의현에도 있었을 것이고 그 장소가 이곳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영천사 맞은편에 영천관이 있었고, 여기에서 정기적인 목사의 점마가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면, 이곳에서 행해졌던 나례는 일반적으로 각 가정과 궁중에서 세말(歲末)에 행해졌던 벽사(辟邪)로서의 나례라기보다는 손님을 맞이하여 벌인 잔치에서 행해졌던 연희(演戱)로서의 나례를 의미한다 할 것이다.
관나암이 있는 내의 폭은 약 12m이다. 그 동쪽가 둔덕에 폭 6m, 가로 12m 이상 돌로 단을 쌓았던 흔적이 보인다. 지금은 나무가 자라 단의 부분만 남아있지만 인공에 의해 기초가 다져진 단으로 보인다. 이곳이 공연을 펼쳤던 무대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로 내 건너에 있는 영천사(靈泉寺)의 불교의식을 나례로 보고 그것을 구경하는 자리라는 뜻으로 새겼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당시 제주의 사찰에서 행해지던 불교의식의 성대함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영천사는 고려시대 창건되었고 영천관과 더불어 이 지역을 방문하는 관리들의 숙소 역할도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다고 전한다. 조선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영천사는 영천천 동쪽 언덕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1400년대 후반에 있었던 사찰임에는 분명하다. 지금 그 터에는 대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관나암 마애명은 영천사와 영천관 두 시설이 존립할 때 새겨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1601년 제주에 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은 이 둘이 모두 폐사, 폐관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관나암 석각은 영천관이 설립되었던 1466년에서 1601년 이전 사이에 새겨진 석각이며, 제주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석각으로 추정된다. (자료 : 고영철의 역사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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