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28) - 신강 위구르자치구 투르판 베제클릭(柏孜克里克)사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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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28) - 신강 위구르자치구 투르판 베제클릭(柏孜克里克)사원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3.0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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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독일 탐험대 (하단 맨 왼쪽이 르콕, 오른쪽 건장한 이가 발투스이다)
(사진 1) 독일 탐험대 (하단 맨 왼쪽이 르콕, 오른쪽 건장한 이가 발투스이다)

 

KBS에서는 1984년 4월부터 12월 초까지 매주 금요일 밤 특집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첫 회 ‘비단의 고장 장안’을 시작으로 해서 마지막 편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까지 총 30편의 〈실크로드〉였다. 일본 NHK 방송국에서 중국과 당시 소련, 터키 등의 협조를 받아 기획, 제작한 특집이었다. 아쉽게도 KBS에서 방영할 때는 본방사수하지 못했다. 방영된 지 10년쯤 지나 불교 미술을 공부하게 되면서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보게 되었다. 지금은 역전되었지만 그때는 전자 제품뿐만 아니라 방송 관련 기획이나 편집 기술도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더 발전되었던 것 같다. 그때 보았던 실크로드의 영상을 통해 언제든 반드시 그곳을 직접 가보겠다는 결심을 했었는데, 운 좋게도 결심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전부는 아니지만 중국령 실크로드를 답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가보지 못한 곳은 죽기 전에 반드시 가서 볼 것이라고 버킷리스트에 올려두었다. 
 실크로드 제작 25주년을 기념하여 일본의 NHK와 중국의 CCTV, 그리고 우리나라의 KBS가 공동으로 신 실크로드를 기획, 제작했다. 25년 사이에 높아진 우리나라의 위상을 증명하듯 LG그룹이 제작을 후원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에 방영되었는데 총 10부작으로, 중국에 있는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들 중 특히 타클라마칸 사막주변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다루어졌다. 10부작 중 두 번째는 〈천 년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투르판’이라는 부제가 붙여졌다. 아마 이 10부작 중 이 2부는 둔황 막고굴의 수하설법도를 다룬 6부와 더불어 백미로 손꼽히는데, 그 이유는 유럽 탐험대들에 의해 뜯겨져 여러 나라에 단편으로만 전하는 베제클릭 사원의 화려한 서원도를 디지털로 복원하는 작업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는 작업을 발전된 IT 기술로 되살려낸 것이다. 

(사진 2) 베제클릭 사원 서원도 부분변상도
(사진 2) 베제클릭 사원 서원도 부분변상도

 

 제15호 굴의 좁은 회랑 양 옆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5장의 서원도 중 11장은 르콕이 이끄는 독일탐험대가 절취해 베를린으로 가져갔고, 나머지는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다. 1905년 르콕이 가져간 실크로드의 유물들은 20개월 후 독일에 무사히 도착했고, 벽화들은 베를린 민족박물관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실크로드의 보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는데 르콕은 그 방을 가리켜 ‘모든 벽화가 완벽히 옮겨온 하나의 작은 사원’이라고 했다. 베제클릭의 벽화를 절취하는 데는 르콕의 부하였던 발투스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그는 섬세했지만 체력이 강해 오랜 시간의 작업에도 벽화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잘 떼어내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무참하게 절취한 악마 같은 이들이지만 독일 탐험대(사진 1)에게는 아주 유능한 일원이었다. 그는 작업을 마치고 베제클릭 사원의 벽에 ‘이 땅의 것을 베를린으로 옮긴다’는 글과 함께 자신의 사인을 남겼다. 아마 그 글을 쓸 때는 100여 년 뒤 자신의 이름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 3) 투르판에서 출토된 우주를 창조했다는 복희여와도
(사진 3) 투르판에서 출토된 우주를 창조했다는 복희여와도

 

 더 참담한 일은 30여 년 뒤에 일어났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후 베를린은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다. 1939년 베를린 박물관에 전시 중이던 대부분의 유물들은 폭격에 대비해 지하로 옮겼지만 르콕이 가져온 베제클릭 사원의 벽화들은 유리 상자에 넣어 단단하게 고정된 상태에다 어떤 것은 3미터가 넘는 크기여서 급하게 지하로 옮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벽화 주변을 모래주머니로 단단하게 보호했는데, 폭격으로 모래주머니가 유리를 눌렀고, 유리가 산산조각나면서 벽화도 복원이 불가능하게 가루가 되고 말았다. 결국 베제클릭 사원의 서원도는 부처님 주위에 그려졌던 승려 얼굴 한 점만 남고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베제클릭 사원이 있는 지역의 위구르인들이 이슬람교도여서 이후 일부 벽화를 훼손도 하고, 지역 농민들은 벽화에 칠해진 안료를 비료로 믿고서 긁어내기도 했으며, 50여 년 전의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홍위군에 의해 파괴가 자행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르콕과 같은 여러 나라의 탐험대가 강탈해 가지 않았더라도 베제클릭의 아름다운 벽화들이 오늘날까지 온전히 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을 자기 나라로 강탈해 가는 것은 그것이 보호 명목이라고 하더라도 정당화 될 수 없다. 문화유산은 원래 자리에 남아 있어야 의미를 갖는 것이다. 

(사진 4) 일본의 중앙아시아 탐험대를 이끈 오타니 고즈이변상도
(사진 4) 일본의 중앙아시아 탐험대를 이끈 오타니 고즈이변상도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실에는 베제클릭에서 온 서원도 파편(사진 2)과 투르판에서 온 복희여와도(사진 3)가 전시되어 있다. 베제클릭의 벽화는 오늘날 러시아, 인도, 중국, 일본, 독일과 한국으로 나뉘어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경위는 20세기 초 교토에 있는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정신적 지도자인 문주이자 백작 작위를 받은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 사진 4)가 자신이 이끄는 정토진종의 기원을 찾고자 대원들과 함께 중국령 중앙아시아를 탐험한 것에 기인한다. 1902년 자신이 참가한 1차 탐험 이후 자신은 인도로 가서 불교 유적을 조사하였다. 1908년과 1910년 2차와 3차 탐험대를 보냈는데,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에 있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자리한 불교 유적지들을 조사하였다. 여기에 투르판과 베제클릭 사원도 포함되었다. 1914년 오타니가 사원의 재정 횡령 문제로 문주직에서 사임하면서 탐험 자금이 동결되고, 자연스럽게 탐험대는 종결되었다. 탐험대에서 수집한 유물들은 교토 니시혼간지에 옮겨져 조사 후 연구서가 만들어지고, 고베 교외의 그의 별장에 보관되었다. 이후 오타니가 중국의 뤼순으로 가자 그의 별장에 있던 일부 유물이 뤼순과 다롄으로 옮겨졌고, 그것들은 지금은 뤼순박물관, 다롄도서관 및 베이징의 중국국가도서관 등에 나뉘어 보관되었다. 중국에 있던 유물이니 중국으로 전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의 수집품 일부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이다. 오타니가 중국과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동안 일본에 있던 그의 별장과 유물을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 1869-1965)라는 재벌에게 팔았다. 1916년 구하라는 자신이 구입한 오타니 수집품 중 373점을 자신의 동향 친구인 데라우치에게 기증했는데, 데라우치는 초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해 있어서 이 유물들은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전시되었다. 해방 후 이 유물은 우리나라에 귀속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된 것이다. 일본에 남아 있던 오타니 수집품은  류코쿠대학박물관과 동경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100여 년 지나자 세 곳으로 흩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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