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칼럼 - 미얀마 군부, 살생의 업을 어찌 감당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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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칼럼 - 미얀마 군부, 살생의 업을 어찌 감당하려나
  • 안종국 기자
  • 승인 2021.03.10 1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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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만달레이에서 시위도중 머리에 총을 맞고 숨진 19세 소녀 카일 신.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시위도중 머리에 총을 맞고 숨진 19세 소녀 카일 신.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지 38일.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거리에서 온 몸으로 저항한지도 한 달이 넘었다. 지난달 28일과 지난 3월 3일까지 불과 4일만에 5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어디론가 끌려간 사람들과 부상자 숫자는 집계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린 19살 태권소녀 카일 신의 사망 소식과 군부의 시신탈취 사건은 도대체 미얀마 군부가 어디까지 잔인하고 타락할 수 있는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게 하고 있다.
미얀마는 널리 알려진 대로 불교국가이다. 한국불교는 중국을 거쳐 전래된 대승불교에 미얀마의 초기불교와 위빠사나 수행법이 전래되면서 더욱 풍부해지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게 되었다. 미얀마는 한국불교와의 인연이 결코 간단한 나라가 아니다.        
시위에 참여하는 미얀마 시민들은 한 손에는 나무나 양철로 만든 방패를, 다른 손에는 유엔(UN)과 미국의 조속한 개입을 요청하는 피켓을 높이 들고 있다. 유엔과 미국이 보호책임(R2P·Responsibility to Protect)을 발동해 달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여러 조건에서 실행되기는 어렵지만, 군경의 진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그렇게라도 매달려 보고 싶은 것이다. 
지난 3월 5일 유엔 안보리는 미얀마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개입여부를 놓고 비공개 상임이사국 회의를 열었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제시되지 못했다. 이는 중국과 러시아가 미온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한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특히 미얀마는 중국이 추구하는 대외정책인 ‘일대일로’ 정책에서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1차 관문으로, 중국은 이미 미얀마 북서부 해상의 천연가스전에서 거대한 관을 연결해, 미얀마 국토를 관통해 중국으로 가져가고 있고 미얀마 북부에서 나오는 대규모 희토류와 석탄도 대량 수입하는 이권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한국에서도 미얀마인들이 모여 군부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한국에서도 미얀마인들이 모여 군부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우리는 지난 1980년 광주에서의 상황을 기억한다. 무자비한 군화발에 짓눌린 광주시민들이 저항하면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희망을 보았다는 미얀마 시민들은 한국이 어떤 형태로든지 도움을 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제주도는 어떠한가? 4.3으로 인한 희생과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역사의 질곡이었다. 생명은 생명이 아니었다. ‘총’을 갖게 되면 ‘생명’은 ‘제거대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생리를 지녔는지도 모르겠다. 미얀마 군부도 인구비율대로라면 90퍼센트 이상이 불교적 가치관을 지닌 불자들일 것이다. 미얀마의 불자들은 신심이 깊기로 소문난 국가다. 그런 그들이 너무나 가볍게 ‘생명’을 죽이는 ‘업’을 쌓고 있다. 불자들은 참담한 사태에 대해 비난에 앞서, 그들을 측은지심으로 먼저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인과’의 불문율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19살의 태권소녀 카알 싱은 “다 잘 될거야(Everything will be OK)“라는 선명한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시위에 참가했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이 표어는 ”끝내 민주주의가 승리할거야“라는 뜻이겠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사회민주화를 위한 희생을 넘어 자신의 시신마저 기증하고 떠난 ‘보디사트바’처럼, ”끝내 자비가 승리할거야“라는 감동마저 던져주고 있다. 
미얀마 군부는 기이한 주장을 펼치며, 명분도 인간성도 지니지 못한 채 일단 강경대책만이라는 퇴로 없는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더욱 큰 희생이 예견되는듯해 안타깝고 조마조마하게 아침마다 뉴스를 주시하게 된다. 
제주4.3의 정신은 화해와 상생이다. 그리고 비극에서 꽃피워낸 평화의 희망이다. 미얀마군부가 간단한 역사상식이라도 있다면, 더 이상의 비극을 멈추고 반성과 화해의 몸짓으로 더 이상 ‘업’의 질곡이 깊어지지 않도록 성찰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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