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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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18]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4.07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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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어찌하여 惠能이라 합니까?”하니,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惠라는 것은 法으로써 중생에게 사랑스럽게 베풀어주는 것이고,
能이라는 것은 능히 부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말이 끝나자 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육조 혜능 생가 입구
육조 혜능 생가 입구

 

黎明에 有二異僧이 造謁ᄒᆞ고 謂師之父曰호ᄃᆡ 夜來生兒ᄅᆞᆯ 專爲安名호리니 可 上惠오 下能也╷니라 

【諺解】黎明에 【黎明은 ᄇᆞᆰ고져 호ᄃᆡ 몯 다 ᄇᆞᆯᄀᆞᆫ ᄢᅵ라】두 奇異ᄒᆞᆫ 쥬ᇰ이 나ᅀᅡ 뵈오 師ㅅ 아비ᄃᆞ려 닐오ᄃᆡ 바ᄆᆡ 난 아기ᄅᆞᆯ 젼혀 爲ᄒᆞ야 일훔 지호리니 上ᄋᆞᆫ 惠오 下ᄂᆞᆫ 能이라 호미 可ᄒᆞ니라. (黎明에【黎明은 밝고자 하되, 못다 밝은 때이다.】두 奇異한 중이 나와서 拜謁하고 대사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밤에 낳은 아기를 오로지 위하여 이름을 붙일 것이니, ‘윗자는 惠이고, 아랫자는 能이라’(고) 함이 가합니다.”)

【解說】⑴ ‘造’는 흔히 ‘만들다’, ‘조작하다’ 등의 뜻으로 쓰이므로, ‘이르다’, ‘다다르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說文解字』에 따르면 “就也. 从辵告聲. (나아가다. 辵을 따르고 소리는 告이다)”라고 한 것처럼 ‘이르다, 나아가다’가 오히려 本義이다. ‘造’와 ‘就’는 疊韻관계이며, 더군다나 ‘造’의 形符가 ‘辵(辶(쉬엄쉬엄 갈 착)’인 것으로 미루어 本義는 ‘길거리에서 발로 걷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造謁’은 ‘와서 拜謁(찾아와 뵙고)’라고 해석한다.
⑵ ‘來’는 詞의 뒤에 쓰여 ‘일정한 시기의 동안’을 나타낸다.
[예문] 我到你們家已經六十多年了, 從年輕的時候到老來, 福也享盡了 『紅樓夢』第一一○回 (내가 집에 도달한지 이미 60여년이 되었는데, 젊었을 때부터 늙었을 때까지, 福도 모조리 누렸다.)
吾幼來在家恒聞如是『晉書·石勒載記 上』 (나는 어렸을 때 집에서 항상 이와 같이 들었다.)
⑶ ‘爲’는 ① 單音節 형용사 뒤에 쓰여 程度나 範圍를 나타내는 副詞를 구성하던지, ② 程度를 나타내는 單音節 副詞 뒤에 쓰여 어조나 기세를 강화시키는데 쓰이기도 한다. 諺解가 ‘專爲’를 ‘젼혀 爲ᄒᆞ야(오로지 위하여)’라고 해석한 것은, 흔히 ‘爲’의 뜻으로 쓰이는 ‘…을 위하여, …을 대신하여’라는 介詞로 생각한 것이며, 단지 介詞目的語가 생략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언해와 같이 해석코자 한다면 “夜來生兒 專爲安名”보다는 “專爲夜來生兒安名”나 “夜來生兒 專爲之安名”가 더욱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생각건대 언해는 위의 용법을 잘 알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예문] ① 廣爲流傳. (세상에 널리 퍼지다.) / 大爲不滿. (매우 불만이다.) / 深爲感動. (깊이 감동하다.) 
② 甚爲親密. (매우 친밀하다.) / 而蚩尤最爲暴, 莫能伐. (蚩尤가 가장 난폭하여 능히 정벌할 수 없었다.) / 尤爲出色. (특히 출중하다.) / 來書置問 皆是辨論學人 用工上疑惑處 當爲決之 俾晩學初機 趣向無滯 『禪要27』 (보내온 편지에서 질문한 것은, 모두 學人들이 공부하는데 의혹들이 생기는 곳을 분별하여 논한 것이니, 마땅히 이것을 해결하여, 晩學者와 初學者 들로 하여금 향하여 나아가는데(趣向) 막힘이 없도록 하리라.)
⑷ ‘安名’은 戒를 받은 사람에게 처음으로 법명을 지어주는 일이다. 
[예문] 安名, 爲新戒者, 初名法名也 『禪林象器箋6』 (安名은 새로 戒를 받는 者에게 처음으로 法名을 이름지어주는 것이다.)
⑸ ‘可’는 ‘적당하다, 알맞다, 적절하다.’라는 뜻이 있다. 
“可 上惠오 下能也╷니라”를 언해는  “上ᄋᆞᆫ 惠오 下ᄂᆞᆫ 能이라 호미 可ᄒᆞ니라. (‘윗자는 惠이고, 아랫자는 能이라’(고) 함이 가합니다.)”라고 해석하였는데, 아마 ‘可’를 ‘가능하다’라는 뜻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可’가 ‘가능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는 주로 助動詞로 쓰이는 경우이며, 조동사로 쓰일 때는 뒤에 술어동사가 있어야 하며, 주어는 그 술어동사의 객체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필자는 ‘上惠 下能’이 ‘可’의 목적어가 되는 것으로 보고 ‘可’는 ‘적절하다, 좋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예문] 可口. (입에 맞다.) / 可人意. (마음에 들다.) / 你這麽做, 正可了他的心了. (네가 이렇게 하면 바로 그의 마음에 들 것이다.) / 來頌 仔細看過 却勝得前日兩頌 自此 可已之 頌來頌去 有甚了期 如叅政相似 渠豈是不會做頌 何故 都無一字 乃識法者 懼耳 『書狀·答 江給事 少明』 (보내온 頌을 仔細해 보았더니, 도리어 앞날의 두 頌보다는 나앗지만, 지금부터는 그만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리저리 頌을 지어본들 무슨 깨달을 기약이 있겠습니까? 叅政과 같이 하십시오. 그가 어찌 頌을 지을 수 없겠습니까마는, 무슨 까닭으로, 전혀 한 글자도 없습니까? 곧 法을 아는 사람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위의 설명을 다시 정리해서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飜譯】새벽녘에 범상치 않은 두 스님이 찾아와 뵙고, 대사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밤 동안에 태어난 아이에게 특별히 이름을 지어줄 것이니, 위는 惠로 아래는 能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父曰호ᄃᆡ 何名惠能고 僧이 曰호ᄃᆡ 惠者ᄂᆞᆫ 以法으로 惠施衆生이오 能者ᄂᆞᆫ 能作佛事╷니라 言畢而出ᄒᆞ니 不知所之러라

【諺解】아비 닐오ᄃᆡ 엇뎨 일후미 惠能고 僧이 닐오ᄃᆡ “惠ᄂᆞᆫ 法으로 衆生을 줄시오 能은 能히 부텻 이를 지ᅀᅳᆯ시라 말 ᄆᆞᆺ고 나니 간 고ᄃᆞᆯ 아디 몯ᄒᆞ리러라 (아버지가 이르되, “어찌하여 이름이 惠能인가?”, 僧이 이르되, “惠는 法으로써 중생에게 주는 것이고, 能은 능히 부처의 일[事]을 짓는 것이다.” 말을 마치고 나가니 간 곳을 알지 못할 것이더라.)
【解說】言畢而出 不知所之: ‘言畢’에서 ‘言’은 주어의 자리에 있으므로 諺解의 “말 ᄆᆞᆺ고 나니 간 고ᄃᆞᆯ 아디 몯ᄒᆞ리러라 (말을 마치고 나가니 간 곳을 알지 못할 것이더라.)”라는 해석을 고친다. 물론 目的語가 倒置된 것으로 본다면, 諺解와 같이 해석한다고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책에서는 가급적 文章成分을 분명히 구분하여 해석하고자하기 때문에 수정한다. 
흔히 “喫茶去”를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고자 한다면, ‘言畢而出’에서 ‘…한 후에, …하고 나서’라는 뜻으로 쓰이는, 시간의 전후관계를 나타내는 ‘而’를 써서, “喫茶而去”와 같이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반면 “喫茶去”는 “차나 한 잔 마시게”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며, 혹 “차나 한 잔 마시세”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喫茶來”라고 써야 할 것이다. 
물론 “喫茶來”는 現代漢語에서는 물론이고 古代나 近代漢語에서도 통용되지 않았으므로 斷言할 수는 없지만, ‘來’와 ‘去’가 動詞 뒤에서 助詞로 쓰일 때의 상황을 考慮해보면 이러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위의 설명을 고려하여 다시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飜譯】아버지가“어찌하여 惠能이라 합니까?”라고 하니,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惠라는 것은 法으로써 중생에게 사랑스럽게 베풀어주는 것이고, 能이라는 것은 능히 부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말이 끝나자 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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