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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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19]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4.14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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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께서 젖을 먹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에는 神人이 甘露를 따라 주었다. 이윽고 자라나서 나이가 스물넷이 되었을 때, 經 읽는 소리를 듣고 道를 깨달아, 黃梅에 가서 印可를 구하시니, 五祖께서 法器로 여기시어, 가사와 법을 주시어 조사의 자리를 잇게 하셨으니, 때는 龍朔 元年 辛酉年(당 고종 12년)이었다.

 

師不飮乳ᄒᆞ시고 遇夜╷어든 神人이 灌以甘露ᄒᆞ더니 旣長ᄒᆞ야 年二十有四애 聞經悟道ᄒᆞ야 往黃梅ᄒᆞ야 求印可ᄒᆞ신대 五祖╷ 器之ᄒᆞ샤 付衣法ᄒᆞ샤 令嗣祖位ᄒᆞ시니 時╷ 龍朔元年辛酉歲也╷러라 

【諺解】師╷ 졋 아니 좌시고 바미어든 神人이 甘露로 저지더니 ᄒᆞ마 ᄌᆞ라 나히 스믈네헤 經 듣고 道ᄅᆞᆯ 아라 黃梅예 가 印可ᄅᆞᆯ 求ᄒᆞ신대 五祖╷ 그르시로다 ᄒᆞ샤 옷과 法과ᄅᆞᆯ 브티샤 祖位ᄅᆞᆯ 닛게 ᄒᆞ시니 그ᄢᅵ 龍朔 元年 辛酉歲러라 (대사께서 젖을 아니 자시고 밤이면 神人이 (나타나) 甘露로 적시었다. 이미 자라 나이가 스물넷에 經을 듣고 道를 깨달아 黃梅에 가서 印可를 구하시니, 五祖께서 ‘그릇이도다.’ 하시고, 옷(가사)과 법을 붙여서(전하여) 祖位를 잇게 하셨다. 그때가 龍朔 元年 辛酉歲(서기661년)였다.)


【解說】⑴ ‘遇’는 ‘만나다’라는 뜻이라고 반드시 사람 따위를 만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어떤 상황이나 시기 등을 만나는 것에도 쓰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기회를 만나다’는 ‘遇機’, ‘재난을 만나다’는 ‘遇難’, ‘어떤 시기를 만나다’는 ‘遇時’ 등으로 쓰인다. 따라서 ‘遇夜’는 ‘밤을 만나다’로서 ‘밤이 되다.’라는 의미이다.
[예문] 堯授能 舜遇時 尙賢推德天下治 『荀子·成相』 (요임금이 능력이 있는 이에게 주고, 순임금이 제 때를 만났네. [이는] 어진 이를 숭상하고 덕 있는 사람을 천거한 것으로, [이로 말미암아] 천하가 [잘] 다스려졌네.)
忽遇喫粥喫飯處『禪要』 (홀연히(갑자기) 죽을 먹고 밥을 먹는 때를 만나) 
⑵ ‘만나다’라는 뜻으로 常用되는 글자는 ‘遇’ 뿐만 아니라, ‘逢’이나 ‘遭’ 등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모두 ‘만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遇’를 쓸 자리에 ‘逢’이나 ‘遭’를 쓰거나, ‘逢’을 쓸 자리에 ‘遭’나 ‘遇’를 쓰거나, ‘遭’를 쓸 자리에 ‘遇’나 ‘逢’을 써도 괜찮은 것일까?
아니면 모두 ‘마음’이라는 뜻이지만 ‘心·意·識’이나 ‘性·情’ 등이 구분되고, 모두 ‘생각하다’라는 뜻이지만 ‘想·念·思’ 등이 구분되며, 모두 ‘보다’라는 뜻이지만 ‘看·見·觀과 視·示’ 등이 구분되듯이, 이것들의 쓰임도 구분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건대, ‘遇’는 壽命이 無量劫인 눈 먼 거북이가 바다 밑을 헤엄치다가 숨을 쉬기 위해​ 100年에 한 번씩 물 위로 올라오는데, 그곳을 떠다니던 나무판자의 뚫린 구멍에 우연히 목이 끼는 것과 같이 뜻하지 않게 만나는 경우에 주로 쓰이고, ‘逢’은 ‘좋은 때를 만나다’라는 뜻인 ‘逢時’, ‘좋은 세상을 만나다’라는 뜻인 ‘逢世’, ‘접대하다, 영접하다’라는 뜻인 ‘逢迎(逢接)’이나, ‘때를 맞추어 즉시 결단하다’라는 뜻인 ‘逢機立斷’과 같이 쓰이는 것으로 미루어, 계획된 만남이거나 좋은 것을 만나는 것에 주로 사용되는 것으로 생각되며, ‘遭’는 ‘遭難(재난을 당하다)’, ‘遭呵(책망을 당하다)’, ‘遭忌(질투를 당하다)’, ‘遭艱(부모상을 당하다)’ 등으로 쓰일 뿐 아니라, 아래의 문장에서와 같이 被動의 의미를 나타내는 문장에도 사용되는 것으로 미루어, 만나되 만나려는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할 수 없이 ‘당하여 만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재앙을 만나다’라는 뜻으로 ‘逢殃’을 쓰거나, ‘우연히 만나다’를 ‘逢見’이라고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이것들의 쓰임을 어떤 점에서 구분할 수 있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체로 위를 정리하여 말하자면, 모두가 ‘만나다’라는 뜻이지만, 구분하면 ‘遇’는 주로 ‘우연히 만나는 것’, ‘逢’은 주로 ‘좋은 상황을 만나거나 계획에 의해 만나는 것’, ‘遭’는 주로 ‘만나려는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만나는 것(주로 부정적인 상황)’에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는 ‘遭’가 쓰인 문장을 예로 들겠다. 
[예문] 遭了毒手. (악랄한 계략에 걸리다. 피살되다.)
險遭不測. (하마터면 뜻밖의 사고를 당할 뻔하다.)
幾遭挫折. (여러 번 좌절에 부닥치다.)
遭情塵 惑亂身心 不安樂處也差別 能知許多差別底 亦差別 若要除此病 但只看箇無字 但只看廣額屠兒 放下屠刀云我是千佛一數 是實是虛 『書狀·答 宗直閣』 (번뇌[情塵]를 만나 몸과 마음이 혼란스럽게 되어, 편안하지 못하는 곳도 차별이며, 허다한 차별을 알 수 있는 것도 역시 차별이니, 만약 이 병을 없애고자 한다면, 다만 ‘無’자만 들며, 다만 광액도아가 칼을 놓고 이르되 “나는 千佛 중의 하나이다.”고 말한 것이 실재인가 거짓인가를 보십시오. )
⑶  ‘遇’가 ‘만나다’라는 뜻으로 쓰이되 주로 ‘우연히 만나는 것’에 쓰인다고 하였다. 즉 앞에서 예로 든 “舜遇時(순임금이 제 때를 만났네)”과 “忽遇喫粥喫飯處 (홀연히 죽을 먹고 밥을 먹는 때를 만나)”을 보면, 순임금이 만난 시기나, 죽을 먹고 밥을 먹는 때는, 우연히 발생한 때라고 생각된다.
이것에 따르면, 본 문장에서 “師不飮乳 遇夜 神人 灌以甘露 (대사께서 젖을 아니 자시고 밤이면 神人이 나타나 甘露로 적시었다.)”는 상황은 언제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간혹 우연히 일어난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이 문장의 정확한 의미는 “[때로는] 대사께서 젖을 아니 드시자, [어느] 밤에는 神人이 나타나 甘露로 적시기도 하였다.”가 될 것이다.
⑷ 年二十有四: ‘有’는 整數와 零數의 사이에 쓰여 ‘又’라는 뜻을 나타낸다.
[예문]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論語·爲政』(내가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뜻을 세웠고,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는 귀로 순순히 받아들였고, 일흔 살이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도 도를 넘지 않게 되었다.)
⑸ 聞經悟道: 보고 듣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視聽’과 ‘見聞’은 같을까? 다를까? 다르다면 어떻게 다를까가 궁금하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중에서, 六根이 六境과 인연하여 얻은 六識, 예를 들면 眼根이 色境을 만나 일으킨 하나하나의 眼識들이 모여 ‘見’이 되고, 耳根이 聲境을 만나 일으킨 하나하나의 耳識이 모여 ‘聞’이 되며, 같은 방법으로 ‘鼻·舌·身·意根’ 등이 각각 ‘香·味·觸·法境’ 등을 만나 일으킨 하나하나의 ‘鼻·舌·身·意識’ 등이 모여 ‘覺(齅·了·覺)·知’가 된다. 즉 하나하나의 眼·耳·鼻·舌·身·意識이 모인 각각의 모임들을 분별하여 ‘見·聞·覺·知(見·聞·齅·了·覺·知)’ 등으로 稱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모임을 다시 第七識인 ‘意’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곧 우리들 각 개인의 主觀(見分)을 구성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주관은 다른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만나게 되면, 새롭게 들어온 相이 견문각지의 활동을 통하여 형성된 기억을 다시 발동시켜, 그 기억(주관)에 의해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이 또 견문각지가 된다. 
따라서 견문각지의 見聞은 주관에 의해 판단해 보는 것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반면 우리는 흔히 텔레비전을 視聽한다고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한번 보고 말뿐 우리의 기억 속에 등재시켜, 우리의 지식이나 주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를 종합해 보면 見聞은 우리의 주관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고, 視聽은 판단하지 않고 흘리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것을 色·受·想·行·識蘊의 受蘊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五蘊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깊이 알고자 한다면, 문일수의 책 『의근과 의식』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⑹ 龍朔: 唐 高宗 때의 年號. 용삭 원년은 당 고종 12년(661)이니, 이 해에 신라 義湘대사가 입당하였다.
위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飜譯】대사께서 젖을 먹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에는 神人이 [와서] 甘露를 따라(먹여) 주었다. 이윽고 자라나서 나이가 스물넷이 되었을 때, 經 읽는 소리를 듣고 道를 깨달아, 黃梅에 가서 印可를 구하시니, 五祖께서 法器로 여기시어, 가사와 법을 주시어 조사의 자리를 잇게 하셨으니, 때는 龍朔 元年 辛酉年(당 고종 1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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