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法華經)의 한역(漢譯)에서 중국의 독보적인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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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法華經)의 한역(漢譯)에서 중국의 독보적인 해석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4.28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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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昊然) 스님이 엮은 회옹혜경(晦翁惠耕) 스님의 새로운 법화경 해석 [2]

대승경전의 금자탑인 법화경에 대한 혜경 스님의 해석법문을 연재합니다. 혜경스님은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출가한 후 평생을 경전연구와 집필활동에 매진하였습니다. 혜경 스님의 법화경에 대한 새로운 주석에 대하여 이 분야에서 뛰어난 법문을 전하신 호연 스님이 편역하여 독자들에게 새롭게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법화경에서 최고의 권위가인 두 스님의 소중한 강설을 소개하게 되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호연(昊然) 스님은 동국대 불교대학원 석사, 중앙승가대 대학원 박사 및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재단법인호연 이사장. 서울정혜선원·도봉사 주지이며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로 있습니다. 현재 BTN불교TV에서 호연스님의“행복나무에 핀 법화경”방송을 강의중에 있습니다. (매주화요일 오전8시30분/오후5시,일요일오후8시방영)

천재적인 한역자(漢譯者)로 알려진 꾸마라지와(바)(鳩摩羅什, kumārajiva. 350〜409)라는 사람의 이름에 관해서이다, 이 사람은 서역(西域) 출신으로『법화경』『열반경(涅槃經)』『유마경(維摩經)』『반야경(般若經)』등 수많은 경전을 한역했다. 이 꾸마라지와가「구마라집(鳩摩羅什)」으로 음사(音寫)되었다. 이렇게 한역되자 이번에는 묘자(苗字)와 이름은 한가운데서 끊는다고 생각했는지「구마(鳩摩)」와「나집(羅什)」으로 잘라버렸다. 진짜로는 꾸마라(童)와 지바(壽의) 복합어이므로 굳이 끊는다면「구마라(鳩摩羅)」와「집(什)」으로 나누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둘로 나누어서「나집삼장(羅什三藏)」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것도 한역 된 후 싼쓰끄리뜨어 등의 원본(原本)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중국에서는 인도에서 경론이 들어오면 이를 번역한 후, 원본을 없애버리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므로 후대에서는 원전을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을 가져온 것으로 짐작된다.

 연꽃의 세 가지 덕에 관해서    
앞서 말했듯이『법화경』의 제명(題名)은『정법화경(正法華經)』과『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대략 두 가지이나, 현재 널리 독송 되는 번역본은 역시 구마라집의『묘법연화경』이다. 무릇 모든 경(經)의 이름, 즉 제명 또는 제호(題號)․제목(題目)은 말할 것도 없이 그 경(經) 전체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묘법연화경』에서의 ‘경(經)’이란, 영원한 불변의 진리로서 부처님의 말씀을 모은 것을 의미하고, ‘연화(蓮華)’란 ‘성스러운 흰 연꽃[白蓮華]’을 말하며, ‘묘법(妙法)’은 “거룩하며 빼어나서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직 한 마디로 수긍이 가는 것”을 말한다.

회옹 혜경 스님
회옹 혜경 스님


그런데「연화(蓮華)」에는 뿐다리까(Puṇḍaarika=백련화=白蓮華), 빠드마(Padma=홍련화=紅蓮華), 우뜨빠라(Utpala=청수련=靑睡蓮), 꾸무다(kumuda=백수련=白睡蓮) 등이 중국(中國)에서는 모두「연화(蓮華)」로 번역되었다. 일단「연화(蓮華)」로 한역(漢譯)되자 이번에는「연(蓮)」과「화(華)」를 둘로 나누어서 「연(蓮)」은 연(蓮)의 열매(實)로,「화(華)」는 연꽃(蓮花)으로 하였다. 이리하여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에서, 「꽃(華)」이「인(因)」이고,「연(蓮)」이「과(果)」로 되었다. 그것을 중생이 부처로 된다는 관계에 적용하여 중생이「인(因)」이고 부처가「결과(結果)」라고 하였다.     
그 위에 연화의 꽃과 열매가 동시에 이룩 된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러나 그것은 연의 꽃에 한한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모든 식물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이룩되어 있다. 꽃이 피었을 때 암꽃술 속에 씨방(子房)이 생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의 꽃은 깔때기 상태(漏斗狀)의 원뿔꼴(圓錐形)의 열매(꽃받침)가 눈에 띄기 때문에 꽃과 열매가 동시에 이룩 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고 본다. 그래서「꽃(華)과 열매(實)」가 동시,「인(因)과 과(果)」가 동시,「중생과 부처」가 동시.일체(一體)라고 하였다. 중생에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단계에서 부처의 성질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하는 의미가 강조되었다.
거기서 주장되고 있는 내용은 평등을 설한 것으로서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 논리 전개의 방법은 인도불교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인과론으로서의 전개는「연화(蓮華)」로 번역된 것에 수반된다. 한역(漢譯)의 독보적(獨步的)인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뿐다리까나 빠드마 등에서「인과동시(因果同時)」, 혹은「인과구시(因果俱時)」라는 것이 강조된 바는 없었던 것 같다. 인도에서 강조된 것은「여연화재수(如蓮華在水)」,「연화불염(蓮華不染)」이라는 것이었다. 연화(蓮華)라는 것은 더러운 진흙에서 나온다. 그 오니(汚泥)에 물들지 않고 청정(淸淨)한 꽃을 피운다. 혹은 연(蓮)의 잎은 발수성(撥水性)이어서 물(水)을 튀긴다. 결코 물에 물드는 일은 없다. 그러한 성질을 인도 사람은 사랑한 것이다. 이것은 연잎의 표면에 돋아난 0.01mm의 털이 가진 발수작용 때문이다. 
이리하여 중국에서는 「연꽃에는 세 가지의 덕(三德)」을 갖추고 있다 한다. 즉 
 ① “어니불렴(淤泥不染)의 덕(德)”
 ② “종자부실(種子不失)의 덕”
 ③ “화과동시(華果同時)의 덕”의 셋이다.
첫째, “어니불렴의 덕”은, “흰 연꽃”은 반드시 더러운 진흙(泥) 속에서 싹을 피워 자라나는데도, 결코 진흙에 물들(染)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일체의 꽃보다 빼어나서, 청정한 아름다운 자태(姿態)․향기․빛깔을 가지고 훌륭하게 핀다고 하는 덕(德)이다.
둘째, “종자부실의 덕”은, 연꽃의 열매는 완숙(完熟)하여 물에 떨어지면 몇 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계속 살아 있어, 발아(發芽)의 조건이 갖추어지면 반드시 싹을 피운다는 덕이다.            
셋째, “화과동시의 덕”은, 다른 꽃들은 꽃이 지고 난 후 열매를 맺는데, 연꽃은 꽃이 핌과 동시에 열매가 맺는다는 덕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덕을 연꽃은 가지고 있어, 이를 “연꽃의 세 가지 덕”이라 부르고 있는 이유이다.
이 “연꽃의 세 가지 덕”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인간이 아득한 옛날 이 우주가 생겨난 이래, 6도(六道) 즉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인(人)⋅천(天)으로 유전하며, 5탁(五濁)의 진흙투성이가 되어 극히 무거운 죄로 더럽혀지면서도 마음속에 있는 불성(佛性,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질)은 연꽃처럼 청정하게 계속된다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5탁(五濁)은, 겁탁(劫濁)⋅번뇌탁(煩惱濁)⋅중생탁(衆生濁)⋅견탁(見濁)⋅명탁(命濁)을 말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더러워져서 바른 일이 행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쁜 것을 보아도 부끄러운 생각이 없고, 또 사회인들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 하는 죄(罪)를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진흙 속에 태어나지만, 연꽃처럼 그것에 침해받는 일이 없는 한 점(一点), 즉 불성을 반드시 가지고 있다. 더욱이 이 불성은 지옥⋅축생도로 유전하더라도 조금도 낡아지거나 훼손되지 않고, 때가 오면 기필코 싹을 피우며 나타난다. 
불성이란, 바꾸어 말하면 나쁜 일을 하면 나쁘다고 알며 좋은 일을 하면 좋다고 아는 마음, 즉 우리의 청정일심(淸淨一心)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 즉 불성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불성이 언젠가 싹을 피워서 세상을 아름답게 꾸며간다.
또 우리는 미덕의 뿌리(善根)를 심으면 동시에 좋은 결과(善果)가 약속되며, 악업(惡業)을 지으면 그 자리에서 나쁜 과보(果報)가 약속된다. 이를 선인선과(善人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 한다. 그래서 이를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이라 한다.
인간의 어리석고 미혹한 눈으로 보면 인과의 도리를 꿰뚫어 볼 수 없으므로 어리석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보시면 선인선과(善因善果)⋅악인악과(惡因惡果)는 그 자리에서 약속되어 있어 원인(因)과 결과(果), 즉 꽃과 열매는 동시에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보살은 상구보리(上求菩提, 因) 하화중생(下化衆生, 果)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말은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화중생(因)하면, 상구보리(果)가 된다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상구보리를 하는데 어찌 하화중생이 된단 말인가. 즉 보살은 아래로 중생을 교화하면 동시에 상구보리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연꽃의 화과동시(華果同時)의 덕(德)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우주가 생겨나면서부터 미혹해 있지만, 이 가슴 속에는 거룩한 부처님이 때 묻지 않고 훼손되지도 않은 채로 항상 계신다. 인과(因果)가 동시에 생기는 것처럼 선근을 심기만 하면 성불은 틀림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이『법화경』이라고 설명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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