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연(昊然) 스님이 엮은 회옹혜경(晦翁惠耕) 스님의 새로운 법화경 해석 [3]
상태바
호연(昊然) 스님이 엮은 회옹혜경(晦翁惠耕) 스님의 새로운 법화경 해석 [3]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5.06 15: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불교(佛敎)는 붓다(佛, 부처님)의 가르침(敎)이다.
호연스님
호연스님

붓다와 그 시대
법화경을 배우기 전에 되도록 정확하게 불교에 대해 알아야만 하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分別)은 완전히 떨쳐내 버리고 차근차근 불교에 입문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새롭게 출발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씁니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불교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못된 선입견(先入見)을 품고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므로 정말로 법화경을 알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모두 버리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 석가모니에 대해 알아야만 하며, 불교가 변천되온 발자국을 더듬으며 출가를 하지 못한 사람이나, 또는 출가했건만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에서 특히 정(定), 곧 선(禪)을 닦지 못한 사람이 성불할 수 있는 대승의 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성불의 가장 지름길인 법화경의 특성을 파악하여 “비록 나 자신은 구제되지 못했지만 남부터 구제하자”. 는 대승의 정신을 잠깐이라도 잊지 말고 이 강의를 끝까지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회옹 혜경 스님
회옹 혜경 스님

불교(佛敎)는‘붓다의 종교’라는 뜻이다. 
붓다(Buddha)는 불교의 개조(開祖)로 받들어진 칭호로서 원래는「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보통명사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니다. 자이나교에서는 자기들의 개조를 붓다라고 부르고 있다. 불교문학에 의하면 유소년(幼少年) 시절의 이름을 싯다르타( Siddhārtha. Siddhattha)라고 하였다고 전해지며, 한역불전(漢譯佛典)에서는 실달다(悉達多)라던가 실달(悉達) 등의 음사(音寫)를 볼 수 있는데, 이 이름은「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한 사람」이라는 뜻이므로 모름지기 후세의 명명(命名)이라고 생각된다. 
붓다는 석가(釋迦, 샤끼야, Śākya)족 출신으로 깨달음에 도달하여「성자(聖者)」가 되었다. 이와 같은 성자를 범어(梵語)에서는 무니(muni)라 하며 한역에서는 모니(牟尼)라고 음사되므로 붓다를 석가모니(釋迦牟尼)라고 부른다. 특히 부처님으로서 존숭(尊崇)하는 때에는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석가문불(釋迦文佛)이라고도 쓰며 일반적으로「석존(釋尊)」이라고 줄여서 번역한다. 빨리어 불전(佛典)에서는 과거(過去) 25불(佛) 최후의 부처님이라 하며 고따마=붓다(Gotama-Buddha)라고 부른다. 고따마는 고대(古代) 성선(聖仙)의 이름으로 그 자손을 가우따마(Gautama)라고 부르며, 가우따마의 이름은 8씨족(氏族) 중 하나의 이름이다. 이리하여 가우따마(그 속어형으로 생각되는 고따마)는 석존의 씨족명(氏族名)이 된다. 붓다가 처음으로 법을 설하려고 녹야원(鹿野苑)에 가까이 갔을 때, 일찍이 고행을 함께한 5인의 고행자들이「고따마가 온다」라고 말한 것이 오래된 불전(佛典)에 보인다. 후대의 범어 불전(梵語佛典)에서는 불교도가 아닌 사람이 붓다를 부를 때에 가우따마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붓다가 태어난 까삘라와스뚜의 왕가(王家)가 가우따마가(家) 즉 고따마 선인(仙)의 자손과 관계가 있다는 소전(所傳)은 없으므로 고따마라는 이름이야말로 붓다의 본명(本名)이 아닌가, 라고 생각된다. 사실 고따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많이 있으며. 그것이 속어형으로 생각하여 후세의 범어문헌에서는 가우따마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붓다의 이모(姨母)로서 의모(義母)가 된 마하=뿌라쟈빠띠(Mahāprajāpati, Mahāpajāpati)가 가우따미(Gautami, Gotami)라고 불렸음이 알려졌으나, 그녀가 태어난 데와다나(Devadana)의 왕가가 가우따미 가(家)와 관계가 있었다는 소전은 없다. 그 위에 가우따미는 여성의 이름으로서 보통의 이름이기에 이것이 본명이라고 생각된다. 마하=뿌라쟈빠띠(「위대한 왕비」라는 뜻)란 명백한 경칭(敬稱)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노납은 지상(紙上)으로나 저술로 주장한 바 있으나, 이 추정이 성립한다면 생후 곧바로 생모(生母)를 잃은 붓다는 의붓엄마가 된 이모인 가우따미의 이름에 연유하여 고따마로 불린 것이 아닌가 싶다. 더 부언하면, 마우드가리야야나(목련존자)도 어머니 마우드가리야니의 이름인, 야니가 여성명사이므로 이를 고쳐서 야나가 된 것처럼 당시의 인도에서는 모계사회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샤리뿌뜨라(舍利子)도 역시 사리(舍利)라는 어머니의 이름에 그 아들이라는 뿌뜨라를 부쳐서 샤리(舍利)의 아들(子,뿌뜨라)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고따미(橋曇彌)의 아들(子)이라는 뜻에서 세상에서는 고따마(구담, 瞿曇)로 부르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고따마는 씨족의 성(姓)이 아니고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붓다가 태어난 것은 히말라야산 기슭의 까삘라와스뚜(Kapilavastu) 석가족의 왕가인데 당시 석가족은 꼬살라국에 속해 있었던 거 같다. 서력기원전 6세기의 초 무렵이다. 그 무렵의 인도는 16의 대국이 있었다고 초기의 불전은 전한다.

국명(國名 괄호안은 빨리어형)과 위치
(1) 앙가 Añga. (Añga) 비하루 주(州) 동부 바가루부루 지방.
(2) 마가다 Magadha (Magadha) 비하루주 갠지스강 이남 일대(一帶)     
(3) 까시 Kāṡi (Kāṡi) 갠지스강과 고구라강에 끼인 지역.       
(4) 꼬살라 Kosala (Kosala) 아우드 지역.
(5) 위릿지 Vṙjl. (Vajji) 간다꾸강 이동(以東) 갠지스강 이북 일대.
(6) 말라 Malla(Mallā) 간다꾸강 이남(以南), 라브티강 이동(以東) 일대.
(7) 체디 Ceḍi(Ceti. Cetiya) 분데르깐뜨.
(8) 왓차 Vatsa(Vaṁsa) 갠지스강.쥬므나강 합류지 일대.
(9) 꾸루 Kuru (Kuru) 델리의 북방에 해당하는 다네사르 지방.
(10) 빤찰라 Pañcāla (Pañcāla) 델리의 북서부 일대.
(11) 마츠야 Mtsya (Macchā) 자이뿌르의 바이라드 지방
(12) 슈라세나 Śūrasena (Surasena) 쥬므나강 중류의 뭇드라지방.
(13) 아슈마까 Aśmaka (Assaaka) 하이델라바뜨주 바이단 부근.
(14) 아완띠 Avanti (Avanti) 중앙주 우자인 일대.
(15) 간다라 Gandhāra, (Gandhāra)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라와루삔디 일대.
(16) 깜보쟈 Kamboja. (Kambaja) 카불강 유역.
이상으로 보면 고대의 북인도의 거의 모두를 포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서해안의 항구 수르빠라까 Sūrpāraka (Suppāraka 폰페이의 북쪽 빠라)와 바루깟차 Bharukaccha (Bhārukaccha. 나르마다 하구에 가까운 프로치)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서 붓다의 교화 활동은 (8) 까지의 8개국에 한정되었다. 게다가 당시 앙가는 마가다에 정복되고, 까시는 혼자(婚資)로서 꼬살라에서 마가다에 증여되고, 마츠야는 꼬살라의 치하(治下)에 있으며, 체디 또한 왓차의 속국이었으므로 현실에는 동(東)에 마가다국, 서(西)에는 왓차국, 북에는 꼬살라국의 세 나라가 정립(鼎立)하여서 약간의 간다꾸강 이동의 위릿지국에, 릿차위 Licchavi 족과 위데하 Videha 족 등이 부족연합체(部族聯合體)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가다 국왕 빈비사라 Biṁbisāra(頻婆娑羅)는 15세에 즉위하고 52년간 (거의 서기전 545-494) 왕위(王位)에 있었는데 즉위하고 얼마 안 되어 앙가를 병합하고, 이어서 위데하족의 왕가에서 왕비를 맞이했다. 이 왕비가 불전에서 이름 높은 위제희부인(韋提希夫人)이다. 이것은 위릿지 부족연합체(部族聯合體)에 쐐기를 박은 것이 되었고, 꼬살라를 동에서 압박하고, 당시 상당한 정치적 동요는 물론 사회적불안(社會的不安)을 야기(惹起)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당시의 종교계 . 정신계에서도 브라흐만교(婆羅門敎)는 이미 지도적지위(指導的地位)를 상실하고 부질없는 제식(祭式)의 신비성(神祕性)을 강조하여 형해화(形骸化)함과 동시에 그 교권(敎權)을 이탈(離脫)한 고행다의 무리가 횡행(橫行)하고, 육사외도(六師外道)를 중심으로 62의 이설(異說)이 횡행(橫行)하여 혼란의 극에 다다랐다. 붓다가 출가한 것은 마침 이와 같은 시대였다. 그리고 수년(數年)에 걸친 수행을 거쳐서 마침내 깨달음에 도달하여 붓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