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길라잡이 [제5회 법문] 마음이란 무엇인가 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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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길라잡이 [제5회 법문] 마음이란 무엇인가 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5.12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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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그분 부처님 공양 올려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첫 걸음은 마음에 대한 아비담마의 이해에서 시작합니다.
“모든 것”[담마, dhamma]은 마음이 앞서 가고 마음은 가장 중요하고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라는 금언은 「법구경」의 첫 게송입니다.  
이 가르침은 법들은 마음을 따라 일어난다는 것이고, 그 마음도 홀로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대상과 짝해서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원효 스님께서 당唐나라 유학길에 어느 동굴에서 잠을 자다가 어둠 속에서 물을 마시고 갈증을 해소하였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자신이 마신 물그릇이 해골바가지임을 알고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났습니다. 
이 순간 원효 스님은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들이 일어난다[心生故 種種法生].”라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 말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게 ‘마음’입니다. 맹인모상盲人摸象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전체 혹은 실상을 알지 못하고 부분에 집착하여 시비하는 것을 ‘장님 코끼리 만지기’ 라고 비유합니다. 이 우화는 불교를 특징짓는 무아[無我, anatta, 실체 없음]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법안法眼과 명지明知가 샘물처럼 솟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주석서 문헌에서는 마음[citta]을 “대상을 사량思量한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 대상을 안다는 뜻이다.”라는 등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대상을 만나면 알아차립니다. 
그 대상은 어떤 것들인가? 여섯 감각기관이라고 하는 눈, 귀, 코, 혀, 몸(피부), 마노[意]의 6문[六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 알려지는 것들입니다.
마음이 하는 일은 대상을 아는 것뿐인데, 그 앎도 여러 단계를 거쳐 찰나적으로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눈[眼]이 파란 색의 물체를 보았을 때, 찰나적으로 일어나는 시각의식[眼識]은 빛깔의 존재를 알아차릴 뿐이고, 그것이 파란 색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는 인식[想, saňňā]의 단계입니다. 
꽃이 눈의 감각기관에 부딪칠 때, 순간적으로 “아, 저게 꽃이구나.”를 인식하는 것은 산냐[saňňā, 想]이고, “저건 빨간색 장미꽃이구나.”라고 그 특징까지 자세히 아는 것은 윈냐나[viňňāna]이고, “저건 지금 현재론 저렇게 머물러 있지만 곧 다른 상태로 변할 거야. 그리하여 살아있는 것들이란 늘 한결같을 수 없는 괴로움이야”하는 것 알게 되는 단계는 빤냐(paňňā, 지혜)입니다.
대상을 안다는 측면에서 보면, 마음[心]이나 알음알이[識]는 같은 말입니다.   빠알리 어語인 ‘윈냐나’를 우리말로 ‘알음알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영어로는 consciouness로, 한자로는 식識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초기불전에서부터 아비달마와 유식에 이르기까지 마음[citta, 心]과 마노[mano, 意], 알음알이[viňňāna, 識]는 뜻에서는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초기불전에서는 그 역할이나 문맥에 따라서 엄격히 구분하여 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방에서 물 끓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이것을 인식의 구조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면, 물 끓는 소리는 인식의 대상[境]이 되고, 감각기관[根]은 귀이고,  의식[識]은 대상을 알아차려서 포착하는 역할을 합니다.
눈과 형색이 만나면 눈의 알음알이[眼識], 귀와 소리가 만나면 귀의 알음알이[耳識] 코와 냄새가 만나면 코의 알음알이[鼻識], 혀와 맛이 만나면 혀의 알음알이[舌識], 몸과 감촉이 만나면 몸의 알음알이[身識], 마노와 법이 만나면 마노의 알음알이[意識] 등등이 발생한다고 말할 뿐이고, 이때 눈·귀·코·혀·몸·의 등등의 여섯 마음[心]이 일어났다는 표현은 빠알리 삼장에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노[意, mano]는 12처에서 법이라는 대상과 함께 쓰이고, 특히 마음이 다섯 감각기관[五根]을 토대로 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대상, 즉 법을 알 때 그 정신적 토대가 되는 역할을 합니다. 
아미담마에 대한 깊은 이해가 생기면 다섯 감각기관[五門]의 인식과정에서 마노가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전前 오식五識의 앞에서는 오문전향의 역할을, 전 오식의 뒤에서는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여 뒤의 조사하는 마음에 연결시켜 주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마노[意]는 형색·소리·냄새·맛·감촉 외의 대상[法]을 알아차리는 정신적 기관이라는 점과 전 오식과 의식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알음알이[識]과 차이가 있습니다. 
인식[想, saňňā]과 알음알이[viňňāna, 識]와 빤냐(paňňā, 지혜)가 공통적으로 아는 성질을 가졌다 하더라도 인식은 ‘푸르다, 노랗다’라고 단지 대상을 아는 정도이고, 무상·고·무아라는 특징을 통찰하지 못합니다. 알음알이는 ‘푸르다, 노랗다’라고 대상을 알뿐만 아니라 특징을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도[道, magga]의 현전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빤냐[般若]는 대상과 특징을 알뿐만 아니라 노력하여 도의 현전에 이릅니다. 
예를 들면, 보석가게의 진열대에 있는 금화 더미가 있습니다. 분별없는 어린아이는 금화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고 둥글다는 정도만 압니다. 보통사람들은 이것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고 또 사람들이 일용품과 향락을 얻으려고 이것을 보배처럼 여긴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혹은 반쯤 도금한 것까지 판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금속 세공인은 이 모든 것을 다 압니다. 그는 금화를 보기만 해도 알며 부딪히는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혀를 대 보거나 손으로 무게를 어림잡아보아도 압니다. 그 금화가 어느 나라에서 어느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까지 압니다. 
인식은 분별없는 어린아이가 금화를 보는 것과 같고, 알음알이는 보통사람들이 금화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빤냐[般若]는 금속 세공인이 금화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citta]이 일어나는 곳에 언제나 인식과 알음알이가 함께 일어나지만 빤냐(지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설령 빤냐가 일어난다하더라도 인식이나 알음알이라고 하는 법들로부터 분리할 수 없지만 빤냐는 닦아야 하고 알음알이는 철저히 안다는 측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sati 행자의 복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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