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길라잡이 [제6회 법문] 마음이란 무엇인가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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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길라잡이 [제6회 법문] 마음이란 무엇인가⑵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5.2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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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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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2. 아비담마와 위빠사나의 관계
3. 위빠사나를 성취하기 위한 두 가지 길
4. 통찰지의 토양
5. 세 가지 관찰
6. 열 가지 위빠사나 지혜
7. 종성(種姓)의 마음
8. 도(道)의 마음
9. 반조의 지혜
10. 세 가지 해탈의 관문

초기경전의 주석서에서는 마음[citta, 心]을 “대상을 깊이 생각하고 헤아린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 대상을 안다는 뜻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마음부수법들[心所法, 쩨따시까, cetasikā]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과 마음부수들의 관계는 ‘왕과 수행원’의 비유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행차하신다.”고 말하지만 왕은 결코 혼자 오지 않고 항상 수행원들(신하들)과 함께 옵니다. 이처럼 마음이 일어날 때 절대 혼자 일어나지 않고 항상 마음부수라는 수행원들과 함께 일어납니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이 일어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마음부수 7가지와 때때로 일어나는 6가지와 해로운 마음부수 14가지와 유익한 마음부수 25가지를 합친 총 52가지 마음부수법을 들고 있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는 그 찰나에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마음부수는 ①감각접촉[觸, phassa], ②느낌[受, vedanā], ③인식[想, saňňā], ④의도[思, cetanā], ⑤집중[一境性, ekaggatā], ⑥생명기능[命根, jīvitindriya], ⑦마음에 잡도리함[作意, manasikāra]등의 일곱 가지입니다. 이 일곱은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마음부수라고 일컫습니다. 따라서 아름다운[善] 마음과 불선[不善]의 마음 모두와 결합할 수 있습니다. 
대승의 유식에서는 보편적으로 항상 마음과 함께 작용한다는 뜻에서 변행심소[遍行心所]라 부르고 있습니다. 다만 남방의 아비담마와 달리 ⑤집중과 ⑥생명기능의 두 가지 마음부수를 제외한 다섯의 심소법만을 말합니다.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①감각접촉이 대상과 마음을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접촉이 없다면 그 어떤 마음도 대상을 알 수 없습니다. ①접촉이 있어야 ②느낌이나 ③인식, ④의도 등의 마음부수들이 함께 작용하게 됩니다. 
느낌[受]과 인식[想]과 심리현상들[行]은 아비담마와 대승의 유식에서 공히 마음, 즉 알음알이와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고 같은 대상을 가지고 같은 토대를 가지기 때문에 심소법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마음은 눈의 대상에 일어났는데 마음부수들은 다른 대상, 예컨대 귀 또는 코의 대상에 관여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말입니다. 
대승의 유식에서 마음과 심소법의 관계를 설명할 때, 부부싸움의 예를 들기도 합니다. 아내가 남편의 권위적인 태도에 화가 났습니다. 이 경우의 마음작동 시스템은 이렇습니다. 남편과의 관계[觸]에서 발생되었고[識], 아내는 불만족스러운 느낌[受]과 자기를 무시한다는 생각[想]과 자기를 인정해주기를 바란다는 갈망[行]과 같은 마음 현상을 경험하고, 이로 말미암아 몸에서 거친 호흡과 얼굴이 화끈거리는 생리적 반응[色]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얼핏 보기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오온[識→受→想→行→色]이 순차적으로 발생하는 것 같지만, 매순간 ‘오온은 모두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위빠사나의 지혜입니다. 남·북방의 아비담마와 아비달마와 대승의 유식에서 이견異見이 없습니다.
마음부수[心所]들은 항상 마음과 함께 결합되어 일어나는 정신 현상이며 전체 인식과정에서 마음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돕는 일을 합니다. 역할로 보면 이 두 가지의 법은 상호의존적이지만 마음을 근본적인 것으로 봅니다. 마음이 중심이고 마음부수가 종속된다는 것은 대상을 취할 때 마음은 일부 마음부수들의 도움 없이도 일어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마음 없이 마음부수 홀로 일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비달마와 유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낌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경험할 수 없고, 인식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생각할 수 없고, 의도라는 심리현상[行]이 없으면 마음은 대상을 알려는 어떤 작위도 할 수 없습니다. 
초기불교는 마음[citta, 心]과 정신[nāmam 名]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신은 느낌[受]의 무더기, 인식[想]의 무더기, 심리현상[行]의 무더기, 알음알이[識]의 무더기 등의 네 가지 무더기들을 지칭합니다. 마음은 수·상·행으로 표현되는 여러 가지 정신적인 법들의 도움으로 대상을 식별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일어나서 대상을 아는 기능을 수행하고 멸합니다. 대상은 다섯 감각의 문[5門]에 부딪칠 때마다[감각접촉] 동시에 여섯 번째 감각의 문[마노, 意]에 부딪칩니다. 다시 말하면 색깔은 먼저 ‘알음알이’라는 의미를 가진, 마음이 알아차리고 다음으로 안식眼識이 지각합니다. 
그런데 다섯 가지의 감관[眼·耳·鼻·舌·身]에 부딪치는 다섯 가지의 대상[色·聲·香·味·觸]과 달리, 마노[mano, 意]의 문에 홀로 부딪치는 대상이 있습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여섯 가지 법이라 하여, 감성의 물질, 미세한 물질, 이전의 마음, 52가지의 마음부수, 닙바나(열반), 개념 등을 포함합니다. 다섯 가지의 알음알이[前五識]의 대상은 현재에 일어나는 물질에 한정됩니다.
마음은 알아차리는 행위를 떠나서, 그 자신 안에 실재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는 행위자도 아니요, 도구도 아닙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마음은 오온 가운데 하나인 알음알이의 무더기[識薀]일 뿐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절대화하면 즉시 외도의 자아이론[我相], 개아이론[人相], 영혼이론[壽者相], 진인이론[士夫相]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 금강경의 참뜻입니다.
그런데 대승경전이나 선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마음은 형이상학적입니다. “마음은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 있지도 않다.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없다. 길지도 짧지도 모나지도 둥글지도 않다. 색깔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없다. 만져지는 것도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찾으면 얻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모든 세계와 국토를 만드나 그렇다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모든 생각, 분별, 말과 글에서 떠나있으나, 그렇다고 이런 마음 작용들과 분리된 별개의 자성을 갖는다고 할 수도 없다.”라고 표현하면서도 이를 절대적 실재[眞如 心, 佛性]라고 이름 짓고 있습니다. 
마음을 이렇게 묘사하면 마음은 고정된 어떤 하나의 실체인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조건에 따라 동요합니다. 마음은 유익하거나[善, kusala], 해롭거나[不善, akusala], 또는 이 둘로 결정할 수 없는[無記, avyākatu] 마음 작용들이 광장일 뿐입니다. ≪sati 행자의 복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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