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연(昊然) 스님이 엮은 회옹혜경(晦翁惠耕) 스님의 새로운 법화경 해석 [4] - 법화경은 번뇌를 멸진한 아라한들에게 설한 것이다
상태바
호연(昊然) 스님이 엮은 회옹혜경(晦翁惠耕) 스님의 새로운 법화경 해석 [4] - 법화경은 번뇌를 멸진한 아라한들에게 설한 것이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5.25 13: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승경전의 금자탑인 법화경에 대한 혜경 스님의 해석법문을 연재합니다. 혜경스님은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출가한 후 평생을 경전연구와 집필활동에 매진하였습니다. 혜경 스님의 법화경에 대한 새로운 주석에 대하여 이 분야에서 뛰어난 법문을 전하신 호연 스님이 편역하여 독자들에게 새롭게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법화경에서 최고의 권위가인 두 스님의 소중한 강설을 소개하게 되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호연(昊然) 스님은 동국대 불교대학원 석사, 중앙승가대 대학원 박사 및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재단법인호연 이사장. 서울정혜선원·도봉사 주지이며 중앙승가대학교 교수로 있습니다. 현재 BTN불교TV에서 호연스님의“행복나무에 핀 법화경”방송을 강의중에 있습니다. (매주화요일 오전8시30분/오후5시,일요일오후8시방영)
회옹 혜경 스님
회옹 혜경 스님

『법화경』에 대해 주의해야 할 것은 「보살을 훈회(訓誨)하는 법(敎菩薩法)」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범어원문은 「보디삿뜨와의 지혜의 완성에 의해서」라고 되어 있다. 왜냐하면 원문은 보디삿뜨와시아(bodhisattvasya)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리살타라는 말은 원어 보다삿뜨와(bodhisattva)의 음역인데 여기서는 보디(bodhi)와 삿뜨와(sattva)와 시아(sya)의 셋이 합해져서 생긴 말이다. 보디(bodhi)에는 여러 가지의 번역이 있는데 이것은 보다(bodha)에서 온 것으로서 「안다」고 하는 뜻이다.

호연 스님
호연 스님

삿뜨와(sattva)는 영어로는 being(존재, 생물)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보디삿트와란 지식이 있는 동물이라는 뜻이 된다. 지식이 있는 동물이란 고등동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메바 등에는 지식이라고 할 정도의 것은 없다. 더 나아가 지렁이에도 아직 지식은 없다. 그 위로 더 나가서 새나 곤충의 무리에도 아직 보디삿트와로 될 자격이 없다. 말하자면 보디삿뜨와란 인류 이상이라는 것이다. 똑같은 인류 가운데도 여러 가지의 등급이 있으나 보디삿뜨와는 비교급이 아니고 최고급인 것이다. 즉 보디삿트와는 하이스트(highest)의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보디삿트와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최고급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뜻을 세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겠다는 마음을 일으킨 사람을 가리켜서 보디(bodhi) + 삿뜨와(sattva)라고 한 것이다. 시아(sya)는 전체 범어의 어미(語尾)인데 우리말의 「……의」에 해당하며 결코「……이」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이」에 해당하는 것은 어미에 S 한 글자를 붙인 것으로 이것이 산스크리트의 주격(主格)이다. 어미에 sya를 붙인 것은 주격에 대해 속격(屬格)이라 한다. 또 어미에 m 한자를 붙인 것은 업격(業格)이라 하여 우리의 「……을, 를」에 해당하며 어미에 e를 붙인 것은 어격(於格)이라 하여 우리가 「……에서」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것이므로 이 글의 뜻은 업격(業格)을 사용하여 「보리살타의」가 된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보디삿뜨와시아(bodhisattvasya)라고 업격을 사용해서 「보리살타의」라고 하였는가 하면, 불교에는 3승(三乘)이라 하여, 보살의 가르침과 성문의 가르침과 연각의 가르침과의 셋이 있는데, 스라바까(sravaka 성문)는 고, 집, 멸, 도의 4제의 법을 닦고, 쁘라띠에까-붓다(pratyeka-buddha 연각 또는 독각)는 무명, 행, 식, 명색, 육처,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의 12인연을 관하는 것이며, 보디삿뜨와(bodhisattva 보살)는 여섯 가지의 빠라미따(paramita 6바라밀 또는 六度)에 의해 오랫동안 익히고 닦는(修業) 것이므로 그 6바라밀 중에서 가장 거룩한 쁘라즈냐-빠라미따(prajna -paramita 반야바라밀다)는 보디삿뜨와(bodhisattva)의 소유물(所有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원문에는 보디삿뜨와시아(bodhisattvasya 보리살타의)라고 되어 있다. 

 다음에 보디삿뜨와(bodhisattva)의 쁘라즈냐-빠라미따(prajna-paramita)에 의하면 마음에 가림(罣礙)이 없다. 라고 되어 있는데 가(罣)란 그물(網)이라는 글자이며, 애(礙)는 거리낌 또는 방해라는 말이다. 그물이 있거나 거리낌이 있거나 하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이 방에서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벽이 있는 곳은 막혀 있으므로 아무리 나가려고 벽에 부딪쳐보아도 나갈 수 없다. 그러나 문으로 나가려면 방해를 받지 않으므로 쉽게 나갈 수 있다.  지금은 일체제법이 개공(皆空)이라고 하므로 마음에 아무 것도 방해받는 일이 없다. 즉 그물에 걸려야겠다고 생각해도 걸려드는 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없기 때문에 걸려들 이유가 없다. 안, 이, 비, 설, 신, 의를 부정하고 있으므로 나도 없고 상대방도 없으므로 가애(罣礙)가 없는 것이다. 공중에는 방해물이 없으므로 공기는 바람이 되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다. 바람이 태평양 한 가운데까지 가서 장애물이 있어 급히 되돌아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 부분을 원문에서는 「걸림이 없이 움직일 수 있다」라고 쓰여져 있는데, 걸림이 없다면 움직일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므로 현장삼장(玄奘三藏)은 특별히 거듭 번역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대승불교는 「보살의 종교」라고 까지 말하기 때문에 이「보리살타」 즉 「보살」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면 대승의 참뜻을 이해할 수 없다.   보살은 예로부터 이를 번역하여 「각유정(覺有情)」이라 한다. 각유정이란, 깨달을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인생에 눈뜬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반드시 자기 혼자만이 눈을 뜨고 있지 않고, 남도 눈뜨게 하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자각(自覺)하려고 하는 사람이며 자각하도록 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많지만 참으로 눈뜬 사람은 극히 적다. 그 옛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에서 한 낮인데도 등불을 켜고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 곁을 지나가던 문하생이,
 “선생님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무언가를 떨어뜨린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그 문하생에게 말했다.
 “사람을 찾고 있는 거야”
 “사람이라고요? 이 근처에 많이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거듭 질문하자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저것은 모두 사람이 아니야”라고 하는 이야기인데 그 진위야 어떻든 소크라테스에게는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과연 그렇다. 저 많은 사람 가운데 사람다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람다운 사람이 스스로 되지 않으면 안 됨과 동시에 또 남을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교육의 이상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고 듣고 있으나 불교의 목적도 역시 사람을 만드는 것에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사람은 결코 입신출세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다. 봉급을 많이 받거나 임금을 많이 받는 그러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스스로가 용감하게 참다운 인간의 길을 걸어감과 동시에 남도 또한 그 길을 걷게 하려는 열정에 불타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대승적이다. 자기 혼자만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자」하고 손을 마주잡고 가기 때문에 소승의 입장과는 매우 그 취지를 달리한다. 따라서 보살이란 마음이 큰 사람이니 도량이 넓은 사람이다. 작은 이기적인 입장을 지양하고, 항상 큰 사회를 살피며 사회인으로서 활동하는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보살이다. 「중생의 아픔은 번뇌에서 생기고 보살의 아픔은 대비(大悲)에서 일어난다」라고 『유마경(維摩經)』에 적혀있으나 그러한 「대비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보살이다. 이기적인 번뇌의 아픔과 이타적인 대비의 아픔, 거기에 존재(存在)로서의 있는 인간과 당위(當爲)로서의 있어야할 인간과의 차이가 있다. 결국은 범부와 보살의 구별이 있는 것이다. 요즘 시끄러운 민주주의도 이러한 인간적 자각을 가진 사람이 나오지 않는 한, 도저히 확립될 수는 없다. 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크리스트도 모든 사람들의 죄를 갚기 위해, 모든 사람들의 구제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한다면 그 크리스트의 마음이야말로 참으로 보살의 마음이다. 십자가를 등에 업은 그가 그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게 한 그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줄 것을 신에게 빌고 있는 마음가짐은 참으로 거룩하고 고마운 것이다. 기독교 성서에 이런 문구가 있다.「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하나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크리스트는 십자가에 매달아졌다. 그러나 그것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제된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시비는 그만두고 우리는 이교도라는 이름 아래 헛되게 이것을 보아 넘기거나 배격해서는 안 된다. 종교인의 이름으로 보살의 이름으로 그를 칭찬하고 우러러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호에 계속)

 불교에서는 보살의 생활, 즉 참다운 인간생활의 이상을 네 개의 카테고리(形式)에 의해 이것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를 4섭법[四攝法]이라 한다. 섭(攝)이란 섭수(攝受)의 의미로서 화광동진(和光同塵),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같이 하는 것, 즉 일체의 사람들을 거두어서 보살의 대도(大道)에 들게 하는 훌륭한 네 가지의 방편이 4섭법이다. 네 가지의 방편이란, 보시(布施)와 애어(愛語)와 이행(利行)과 동사(同事)를 말한다. 보시(布施)란, 베푸는 것으로서 일체의 공덕을 아낌없이 모두 주어서 남을 구제하는 것을 말하며, 애어(愛語)란, 자애(慈愛)에 가득 찬 말을 가지고 남에게 말을 걸거나 대답을 해주는 등 상대방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이행(利行)이란, 훌륭한(善巧) 방편을 짜내서 남의 생명을 배양하는 행위이며, 동사(同事)란, 남이 원하는 일을 이해하여 그것을 도와서 유도하는 것을 말한다. 화복(禍福)을 분별하여 고락(苦樂)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살의 길(道)로서 이 네 가지의 방법이 설해져 있지만, 그 네 가지 방법의 근본은 결국 자비의 마음이다. 탐내고 인색한 마음, 즉 탐욕의 마음을 떠난 자비의 마음을 따로 두고 어디에도 「보살의 길」은 없다. 불쌍하고 가련함에 베푸는 자비의 마음이야말로 보살의 마음인 것이다. 아니 그것이 그대로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행」으로서 불교에서는 6도[六度], 즉 6바라밀이라는 것이 설해져 있다. 이 6바라밀의 최초의 행은 보시이다. 이 보시의 행위가 모태로 되어 다른 다섯 가지의 수승한 행이 생긴다. 그런데 바라밀이란 반야바라밀다의 바라밀로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피안에 건너간다」라는 것인데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는 데에는 여섯 가지의 행이 있다는 것이 6바라밀, 즉 6도이다.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전진과 선정과 지혜가 그것이다. 보시란 탐욕의 마음을 버리고 남을 불쌍함에서 베풀어 주는 것이며 지계(持戒)란, 규칙 바른 생활의 의미로서 도덕적인 행위이다. 인욕(忍辱)이란, 참고 견디는 인내(忍耐)이며, 정진(精進)이란, 노력하는 것으로서 온 생명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선정(禪定)이란, 침착함인데 마음을 가라앉게 하는 것이니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하는 경지이며, 지혜(智慧)란, 곧 반야(般若)의 지혜이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뚜렷하게 인식하는 것으로서 분별을 떠난 무차별적인 마음가짐을 말한다. 반야바라밀을 지혜의 완성이라고도 하는데 「너와 내가 그대로 하나임」을 아는 무분별적인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지혜이며, 이 지혜의 바탕 위에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자비이다. 예로부터 자비란 「발고여락(拔苦與樂)」이라 하여 남의 괴로움을 뽑아서 그 자리에 사랑을 주는 것을 말한다.  
 맨 처음에 내가 반야의 지혜야말로 피안에 건너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으나 여기서는 또 보시가 6도의 모태라고 하며 보시야 말로 6바라밀의 근본이라고 말하니, 어느 것이 진실하냐고 의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모두 진실이다. 불교에서는 지혜와 자비란 둘이면서도 하나이다. 하나를 두 가지 측면에서 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는 자비를 뜻한다. 참 자비는 지혜의 눈이 열려있지 않으면 한낱의 동정에 불과하다. 내가 쓰고 남는 것을 베풀어주어서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자비는 아니다. 대비는 그렇다고 맹목적인 사랑은 아니다. 반드시 바른 비판과 엄정한 판단과 잘못 되지 않은 인식, 즉 지혜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6바라밀의 완성에 의하지 않고는 피안으로 건너갈 수 없다. 그래서 보시가 반야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한번 종교적 반성을 해 본 사람이면 거기에는 어떤 구애(拘碍)도 거치적거림도 장애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길이야말로 무애(無礙)의 한 길[一道]이다. 어떤 거리낌도 없는 하얀 길[白道]이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라고 한 것은 바로 그것을 가리킨 말이다.
 가(罣)라는 글자는 그물(網)을 말한다. 즉 물고기를 잡는 그물이며 애(礙)라는 글자는 장애물 등 방해, 걸림이라는 의미이다. 범어원전에는 「가애(罣礙)가 없다」라는 곳이 「걸림이 없이 움직인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고 사로잡히지 않으며 스무스하게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즉 「가애가 없다」라는 것이다. 돈을 구하고, 이름(名譽)을 구하고, 권세(權力)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가애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돈이라는 그물, 명예라는 그물, 권력이라는 그물에 걸려서 무애(無碍)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하지 않는 것이야(無願)말로 「무애(無碍)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