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가 만난 사람 - 충혼각 주지 현명 스님 “오늘의 평화를 만든 호국영령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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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가 만난 사람 - 충혼각 주지 현명 스님 “오늘의 평화를 만든 호국영령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 안종국 편집국장
  • 승인 2021.06.08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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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올해는 6.25 발발 72주년을 맞는다. 전쟁의 폐허에서 그 비극을 딛고 대한민국은 눈부신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룩했다. 경제규모 세계 10위에 올랐으며,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사회문화적으로도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었다. 유엔 참전국의 지원과 국군이 지켜낸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것이다. 이에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는 충혼묘지와 충혼각을 찾아 현명 스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점차 희미해져가는 애국의 역사를 되새겨보았다. / 편집자          

   

충혼각 주지 현명 스님
충혼각 주지 현명 스님

 

          
 
△6.25 발발 72주년을 맞았습니다. 전몰군경 추모위령재가 지난 해에는 코로나19 위기로 봉행되지 못했다가 올해는 조용하게 봉행했는데요. 
▲1966년 시작된 추모위령재가 지난 해 처음으로 못하는 사태가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올 해는 내부 인원만이라도 위령재를 열지 않으면 그 맥이 정상적으로 이어가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에 열게 되었습니다.  

△충혼각의 유래가 어떻게 되나요?
▲충혼각은 본래 사라봉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본래 제주도에서 1956년경 한국전쟁 이후 제주시 사라봉(現 모충사 근처)에 전몰군경 위패와 유골을 임시 봉안하기 위해 지은 것이 그 시초입니다. 그런데 설봉 스님이 부임하기 이전에는 관리자가 없어 비가 새는 등 관리가 허술했어요. 그 당시 보림사 신도였던 백치선 보살이 1966년 사라봉 사라사에서 기도 중이던 설봉 스님에게 이곳 관리를 부탁해서 처음으로 ‘제주 전몰군경 합동위령대재’를 봉행하면서 안착하게 된 것이죠.

△처음에는 위령재가 어떻게 봉행되었죠?
▲설봉 스님은 한림 옹포 출신으로 14살 무렵 절에 들어와 17세에 백양사에 가서 수행하셨습니다. 그러다가 21살에 6.25에 참전을 하게 됩니다. 그때 1951년 6월 25일 강원도 전투에서 중공군이 쏜 탄알이 다리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게 돼요. 이 때 상황을 스님은 ‘우리 부대가 전멸하다시피 했는데 온 산이 불바다였다’며 당시의 기억을 회상했다고 해요. 설봉 스님은 총상 입은 다리를 지혈하기 위해 분대장이 헝겊탄띠로 내 다리를 감는 순간 적의 탄알이 분대장을 관통했답니다. 그래서 분대장은 바로 30m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결국 전사했다고 합니다. 그때 ‘위생병…’하는 소리가 포탄소리에도 선명하게 들렸다고 하면서 자기 때문에 희생당한 분대장에 대한 미안함이 한이 되었답니다. 그 분대장의 이름도 모르고 단지 하사였던 계급과 고향 정도만 기억난다면서 위패조차 모시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래서 스님의 마음속에는 분대장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고, 충혼각에 부임한 이후로 이처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들의 영혼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설봉스님은 부임한 그 해부터 부처님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 18일 입재, 20일 회향하는 ‘제주 전몰군경 합동위령대재’를 봉행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관리가 엉망이던 이곳에 여법한 부처님이 모셔지고 호국영령들의 안식처를 찾아주는 위령제가 열리자 전몰군경 유족을 비롯해 미망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어요. 

△당시 관리는 어떻게 되었나요?
▲전쟁 직후에는 전몰군경 충혼묘지는 도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관리도 체계적으로 되지 못했죠. 그러다가 50년대 말부터 사라봉에 충혼탑이 세워지고 흩어졌던 묘지들도 한곳으로 모으게 됩니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충혼각이 자리잡게 되고 1966년에 위령재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중심적인 위치에 서게 된거죠. 그러다가 1968년 베트남전쟁이 발발하자 제주지역 전사자 유골들이 들어오게 되고, 그분들을 충혼각에 며칠씩 안치하였다가 무연고자는 충혼묘지에 매장도 하게 됩니다. 당시 제주에는 유골함을 모실 공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충혼각이 활발하게 그 역할을 했고, 그러다가 점차 행정도 자리잡게 되고 유족들도 모임이 형성되기 시작해요.      
 
△사라봉은 4.3당시 희생된 제주도민들의 공동묘지였지요?
▲사라봉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해요. 4.3사건시기에 희생된 시체들을 바다에 많이 버리게 되는데, 그 시신들이 해류를 타고 도두봉과 사라봉 기슭에 둥둥 떠올라요. 그들을 건져 묻은 묘지들이 여기저기 생기기 시작했는데, 6.25이후에는 전몰장병들도 묻히게 됩니다. 초창기 충혼각은 변변한 화장실 하나 부엌 한 칸 조차 없이 스님은 법당 귀퉁이에서 잠을 청해야 했을 만큼 장소가 협소했어요. 그러나 신도들은 늘어나고 유족들이 편이 쉴 공간조차 없어 충혼각을 중창불사를 하려고 사유지를 기부채납도 했는데, 결국 사라봉이 공원부지로 묶여,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됩니다. 그래서 충혼묘지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1990년 1월에 대웅전을 옮기게 됩니다. 본래 이곳에는 1984년부터 시립납골당이 있던 곳이고, 지금도 활용하고 있어요.   

△위령재가 올해 55회째 봉행되었는데요? 
▲설봉 스님은 4·3 당시 토벌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셨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부상당해 명예제대 하는 등 죽음의 고비도 넘겼어요. 충혼각에는 4·3 당시 자신을 고문했던 토벌대와 군경을 비롯해 6·25군경, 월남 참전 용사 등 1000명의 호국영령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결국 모두가 희생자이고 나라를 위해 노력하다가 숨진 분들입니다. 이념이나 남북간 적대감이 아니라 어찌보면 향토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겠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6.25당시 입대하여 참전한 분들은 해병대나 맹호부대 소속이 많아요. 충혼각의 대웅전에는 전몰군경 1000여명의 납골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을 위해 매년 음력 9월 9일이면 ‘납골당 합동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음력 9월 9일은 중국 민간의 중요한 전통명절인 중양절(重陽節)로 유주무주 영가들의 제사를 지내면 좋다는 날입니다. 특히 이곳 납골당은 제주시에서 도시구역개발로 인해 화장된 무주고혼 영혼들이 절반가량 모셔져 있기도 해요.

△갈수록 호국영령에 대한 고마움이 희석되고 있는듯합니다.
▲그렇습니다. 해마다 현충일이 되면 학생들이 와서 환경정비도 하고 호국영령에 대한 이야기도 듣곤 했는데, 몇 년전부터인가 교사와 학생들도 찾지 않고 있어요. 이제 전몰군경 유족들도 대부분 사망하고 2대3대 내려온 데다가 최근 통계에 따르면 20대 절반이 한국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고 하잖아요.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그때 우리나라가 북한 중심이 통일이 되었다면,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자유경제강국이 되었을지 의문이죠. 민족의 비극이지만, 어찌되었든 4.3의 광풍과 6.25의 거센 풍랑속에서 이렇게 오늘의 번영을 누리는데도 그 분들의 희생이 밑거름이 되었을 터인데, 호국영령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점차 식어가는 듯해 안타깝습니다. 

△나라사랑의 소중함마저 줄어들까 걱정입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호국불교의 전통을 갖고 있어 ‘충’을 떼어 놓고는 설명되기 어려워요. 임진왜란에서 승병의 전과는 중요 고비마다 전세를 바꾸었어요. 고려시대에도 불교를 중심으로 뭉쳐서 외세와 싸웠고, 제주도로 온 삼별초는 세계최강 군대인 몽고에 맞서 끝까지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제주불교계의 항일운동과 4.3에서의 애민적 실천도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부분이죠. 그런데, 지금은 반공이 국시이던 시대의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보국충정과 애국은 중요한 역사적 고비마다 우리나라를 세우고 지켜온 원동력이 분명합니다. 한 때 반공이 애국이라는 6-70년대의 시대적 상황도 이해해야 하지만, 이제는 평화를 위한 상호협력과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희생하신 순국선열의 의미를 확장하고 더 큰 마음으로 기억하고 기려야 할 것입니다. 

△특히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러한 호국충정을 기억하도록 해야 하겠지요?
▲올 연말이면 새롭게 국립묘지가 개원하게 됩니다. 앞으로 이러한 공간이 학생과 미래세대가 호국영령을 기억하고 공부하는 곳이 되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불교는 제주도에서는 특정 종교가 아니라 제주도민의 삶과 아픔을 함께 해온 문화적 자양분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충혼각의 55회를 이어온 위령재를 전몰군경유족회와 함께 문화행사도 등 더욱 다채로운 행사로 발전시켜 젊은이들에게 그 의미가 이어가도록 하려고 합니다.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합니다. 
▲현재 법당은 시청, 납골당은 양지공원에서 관리감독하고 있고, 또 이 지역은 한라산국립공원지역으로 중창불사도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일반인들도 편안하게 드나들면서 애국의 전당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늘날 남과 북이 상흔을 딛고 대결보다 대화를 통해 협력과 통일을 도모하는 상황이지만, 호국과 애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 정신을 기리는 일은 더욱 선명하고 의미깊은 일이다. 이는 그 희생의 기반에서 오늘날 경제적 힘이 성장했고, 결국 평화를 위한 밑거름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희생하신 넋을 되새겨보는 호국보훈의 마음가짐은 그래서 더욱 소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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