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고시레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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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고시레의 전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7.07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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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범 - 제주한림문학회 회장본지 객원기자
김승범 - 제주한림문학회 회장본지 객원기자

해안동에는 들판에 나가 일을 하다가 점심때가 되면 밥을 먹기 전 조금씩 떠서 사방에다 뿌리며 자연과 나눠먹는 의식을 행한다. 이때 고시레, 고실에, 고슬에 등의 소리를 내는데 이 의미를 어릴 때는 잘 몰랐다. 구전을 통해 막연히 전해와 그냥 귀넘어들었을 뿐이다. 
부모님과 같이 일을 하며 느끼고 들었을 때 부모님들은 조냥하면서 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는데 이 고실에의 의미도 희망의 소리 중 하나였다. 비록 지금 먹을 것이 부족하더라도 고실에(가을에의 제주어) 먹을 것으로 들판에 뿌려놓으면 가을에 풍성한 수확으로 돌아오는 것을 조상들은 몸으로 익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덜 먹더라도 가을을 생각하며 준비해 놓으면 맘이 따뜻하였던 것이다. 현실적이지 않은 방법이지만 이 풍습에는 여러 가지 의미도 같이 담겨 있었다. 늘 생과 사가 함께 있음을 생각하며 조상들에게, 자연과 들에, 새들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의식이다. 제주도뿐만이 아니고 전국에서 고시레의 풍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에 대한 기록을 보면 도선국사 또는 진묵대사, 그 외 이름난 지사의 이야기라고 하는 설화가 있다 . 다른 타 시도에서도 들에 나가 일을 하다 새참이나 점심을 먹을 때 또는 야외에서 식사를 할 때 첫 숟가락을 떠서 들판에 던지며 ‘고시래’라고 말하는 풍속이 있는데 그래야 풍년이 들고 복을 받는다고 한다. 
옛날에 고씨 성을 가진 예쁘고 착한 처녀가 있었다. 하루는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탐스럽게 생긴 복숭아가 하나 떠내려 와 남몰래 건져서 먹었다. 그런데 그 후로 잉태해 배가 불러오더니 아들을 낳았다. 처녀의 부모가 이를 망측한 일이라 하여 어린아이를 개울가에 갖다 버렸다 . 
그때는 마침 엄동설한이라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갑자기 까마귀 수천 마리가 무리를 지어 날아와서는 날개를 서로 이어 어린아이를 덮어주고 먹이를 구해 다 주어 수십 일이 지나도 어린아이가 죽지 않았다. 
이를 보고 처녀의 부모가 이상히 여겨 다시 데려다 길렀다. 그리고 복숭아를 먹고 낳은 아들이라 하여 이름을 도손(桃孫)이라고 지어 주었다 . 
도손은 자라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며 중국에 건너가 도통한 스승으로부터 천문과 지리와 음양의 비법을 배워 풍수지리에 통달하게 되었다. 
그가 귀국하자 시집도 못 가고 혼자 산 어머니가 죽었다. 도손은 명당을 찾아 어머니를 묻기로 했다. 그러나 다른 자식도 없고 복숭아를 먹고 태어난 자신도 중이 되었기 때문에 발복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면서 어머니를 산에 묻지 않고 들 한가운데에 묻었다. 
사람들은 풍수지리에 통달한 사람이 어머니를 산에 묻지 않고 들에다 묻었다고 욕하였다. 그러나 도손은 “여기가 배고프지 않은 명당이다.”하며 그대로 두었다. 
농사철에 근처의 농부가 일을 하다가 점심을 먹을 때 제사를 지내주는 자손도 없는 묘를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농부는 들에서 일하다가 밥을 먹을 때면 “고씨네” 하면서 그 여자의 성을 부르며 밥 한술을 던져주었다. 
그런데 그 해에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다른 집들은 농사가 다 망쳤는데, 그 농부의 농사만 풍년이 들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고씨네 무덤에 적선을 했기 때문이라며 그 다음부터는 서로 묘에 음식을 갖다 주며 “고씨네”하고 불렀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발음의 변화로 인하여 고씨네가 고시래로 변음 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그 후로 들에 밥 한술을 던지며 “고시래”하는 습관이 지금에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까지가 고시레에 대한 스토리텔링이다. 제주도에는 무궁무진한 문화적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있다. 오죽하면 절오백 당오백이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소재가 엄청나게 많다는 뜻이다. 신을 신성시함과 동시에 사람들이 살면서 잠시 쉬고 살만한 공간을 현실과 정신세계에도 만들고 잘 활용하여 살아왔다. 제주도에는 마을이나 집집마다 은밀한 공간이 있었다. 큰 나무근처나 큰 바위근처, 오묘한 돌담길옆, 보통보다 특이한 곳은 신성한 장소로 여겨 맘으로나 실제로 접근을 멈추어 자연의 안정을 주었다. 집근처에도 마찬가지다. 창고 옆 으슥한 공간이나, 장독대 근처, 통시(화장실 근처) 뒤쪽에도 으슥한 곳에는 신성한 장소로 여기고 사람들이 스스로 접근을 삼갔다. 특히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을 치다가 이런 장소로 숨으면 알면서도 더 쫓아가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인 것이다. 부부싸움을 해도 마찬가지다. 보통 부인이 달아나 이러한 장소로 숨어들면 아무리 화가 나도 물러나서 화를 잠재우는 시간을 갖게 된다. 조상들이 무의식적으로 전하며 만들어 놓은 정신세계다. 정말 훌륭한 미풍양속이다. 잊혀진 것들은 다시 발굴해 나가고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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