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길라잡이 (9) - 업(業, Kamma)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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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길라잡이 (9) - 업(業, Kamma)의 가르침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7.0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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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그분 부처님 공양 올려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사띠행자 - 유 현
사띠행자 - 유 현

불교는 이 우주가 창조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인격적 법칙을 따라서 움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뜨는 해와 별들이 하루같이 궤도를 도는 것은 원인과 결과 또는 작용과 반작용이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자연의 법칙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지식인들은 바깥 물질세계의 필연적 인과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과학적 분석과 증명을 잘하면서도 유독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영역에서 인과율이 똑같이 작용하고 있음을 간과하여 왔습니다. 
불교는 유신론이나 유물론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도덕적 측면에서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서 선하고 건전한 의지적 행위는 언젠가는 반드시 그 행위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반면, 나쁘고 불건전한 행위는 고통을 안겨 준다고 말합니다. 
도덕적 측면이 개개인의 삶 속에 투영되어 밖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 그 모습을 가장 잘 정리하여 우리 범부 중생들에게 보여준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업(業, Kamma)의 가르침입니다. 인과는 불법의 핵심입니다. 지혜를 닦는 수행, 위빠사나의 원리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영어에서 do동사의 의미가 아주 광범위하게 행위 일반을 나타내듯이 깜마(Kamma)라는 용어는 산스끄리트 등 인도어 일반에서도 행위 일반을 뜻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무슨 행위든 그것을 모두 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행위 중에서도 의도(cetanā)가 개입된 행위를 업이라고 말합니다. 「꿰뚫음 경」(A6:63)에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노니 의도한 뒤 몸과 말과 마음[意]으로 업을 짓는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과 아라한들을 제외한 모든 존재들의 의도 또는 의도적 행위는 업이 됩니다. 부처님과 아라한들의 경우에는 업의 근원이 되는 무명과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돼버렸기 때문에 업을 짓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과 아라한들도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한 그분들의 지난 생들에서 지은 업과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존재가 바깥 경계에 대하여 이를 지켜보는 데서 멈추지 못하고 그 사태에 정신적으로 관여하여 이러저러한 입장과 자신과를 동일시하거나 반대하거나 하는 등등으로 휘말려 들 때 늘 그것에 어울리는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을 만들게 되고, 그것이 공덕이 되건 악덕이 되건 대상과 밀착, 연결시키려고 마음 작용을 일으킵니다. 
마치 인부들과 함께 벼를 타작하는 마당에 선 주인이 자신도 쉬지 않고 일함으로써 아랫사람들이 더 열심히 일하도록 자극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라한을 제외한 모든 의도적 행위는 유익한 것[善]이 아니면 해로운 것[不善]이 됩니다. 따라서 유익한 마음과 해로운 마음은 업을 짓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업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지었음’ 때문에 반드시 과보(vipāka)를 가져옵니다. 마치 씨앗을 심으면 그 종자에 고유한 열매가 열리듯이 의도적인 행위는 그 의도한 선 또는 불선의 성질에 따라 각각 고유한 특성으로 나타납니다. 이를 업의 법칙(Kamma-niyāma)이라고 합니다.
업의 과보 또는 업보는 금생에 일어나거나 혹은 다음 생에 일어나거나 혹은 일어나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은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삼매에 들면 이 살아있는 육신에 아주 좋은 물질을 생성하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윤회, 재생이라는 것은 인과적 생성원리에 따라 업에 의지하여 업보로부터 모태와 태어날 곳이 생기는 것일 뿐이고,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있어서 그 업보에 따라서 태어날 곳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업보에 업이 없고, 업에 업보가 없어서 그 둘은 각각 공하지만 업이 없이는 업보가 없다’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다른 한편 불변하는 아뜨만(자아)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재육화再肉化하는 것을 윤회라고 보는 힌두교에서는 전생의 업이 금생의 나를 결정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자아(아뜨만)라는 것은 실체가 없어서 공空한 것이고, 현재의 이 몸뚱이는 과거의 업보를 소유함과 동시에 현재의 업에 의해 새롭게 바뀌어가는 상속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업에 대한 작은 분석 경」(M135)에서 세존께서는 비록 윤회에서 삼악도, 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살생하면 단명하고, 남을 해치면 질병이 많고, 화내고 성내면 용모가 추하고, 질투가 심하면 권세가 없고, 보시하지 않으면 가난하게 되고, 완고하고 오만하면 비천해지고, 착하고 건전한 업을 모르면 우둔한 자로 태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며, 그 반대의 경우에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고 설하셨습니다. 이를 일컬어 업의 길[業道, kamma-patha]이라 부릅니다. 
선한 업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를 둘러싼 환경 역시 훌륭합니다. 중생들의 업이 좋고 나쁨은 그들의 근본 마음과 연관됩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등이 과도하다면 업은 자연히 좋지 않는 방향으로 기울게 됩니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업은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서 금생에 받는 업, 다음 생에 받는 업,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는 업 등으로 구분합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되지 않는 한 자기가 지은 업은 반드시 언젠가는 받아야 합니다. 
우수한 과학의 힘으로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더라도 절대 권력자가 개인이나 집단의 가장 사악한 목적을 위해서 이웃을 협박하거나 전쟁의 무기로 쓴다면 이는 상상을 초월한 파괴破壞 업으로 작용합니다. 
업의 정의를 요약해 봅니다. 12연기의 상카라(sankhāra, 行, 업 형성), 즉 업 형성의 상카라와 동의어이고, 이것은 삼계의 유익하거나 해로운 의도, 그리고 이러한 유익하거나 해로운 의도와 결합된 마음부수법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업은 유익한 법들, 해로운 법들, 결정할 수 없는 법들[無記]을 이해하는 핵심이기도 하고, 또한 유익한 마음과 해로운 마음 등을 포함한 89가지 마음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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