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21] - 한라산 관음사, 평화와 치유의 길에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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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21] - 한라산 관음사, 평화와 치유의 길에서 만나다
  • 글 : 김익수 대기자
  • 승인 2021.07.07 1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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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로천 김대규 화백
그림 : 로천 김대규 화백

 

녹음이 짙은 아침 이슬을 한껏 마시며 작은 숲이 내주는 길을 걷는다. 찬란한 한줄기 빛이 한라산 북사면 아미봉에 솟아오르니, 제주불교 관음사가 한 눈에 들어선다. 제주시 한라산 동북쪽 기슭 산천단(山川檀)에서 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도중에 청운마을을 지나면 대한불교조계종 23교구의 본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관음사는 본사로 도내 약 40여 개의 종단 내 사찰을 관장하고 있다.
아미헌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동쪽에는 사찰 안내소가 마련되어 있어서 관음사를 찾아오는 분들을 맞이해 안내하고 있다.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일주문을 마주한다. 사천왕문을 향하는 좌우에는 세월의 무게를 안고 수행 삼매 중인 돌부처님이 염주와 함께 미소를 짓고 있다. 
가람의 배치를 살펴보니, 대웅전을 중심으로 오른쪽 삼성각(三聖閣), 설법전, 범종루가 배치되어 있고, 남쪽에는 나한전이 자리하고 있다. 왼쪽으로는 지장전(地藏殿)과 선(禪)센터, 영락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사리탑과 초전법륜상, 해월굴, 관음굴, 아미헌의 사찰음식체험관 등이 배치되고 있다. 해월굴 앞에는 해월당 봉려관 스님 탄신 156주년 맞아 다례재를 봉행하는 현수막이 내걸어 있었다. 암흑기를 깨운 제주불교의 선각자이시며 중흥조인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근대 제주불교를 탄생시킨 공덕은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해월당 봉려관 스님은 1907년 12월8일 대흥사에서 수계를 받음으로써 근대 제주불교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으며, 1908년 1월5일 산천단에서 수행하다가 제주불교 최초의 종교행사인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펴셨다. 스님은 약 200년 동안 불교의 자취마저 사라져버린 제주에서 불문에 귀의하셨다. 해월당 봉려관 스님은 온갖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오직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원대한 원력을 세워 제주 땅에 불교의 씨앗을 뿌렸다. 관음사 창건을 시작으로 십 여 개의 사찰을 창건하거나 중창하셨다. 또한 일제 강점기 법정사 무오항일운동의 주역인 김연일. 강창규 스님들께 거처와 자금을 제공하는 등 항일운동의 중심에 서서 온 힘을 다 바쳐 온 애국자이시며, 제주불교의 큰 선각자요, 중흥조이시다. 
해월당 봉려관 스님이 쌓아온 공덕을 선양하기 위한 2010년 관음사에서 도남 보덕사 혜전 스님을 중심으로 (사)봉려관선양회가 창립되었으며, 이후 관음사와 함께 강연회, 토론회, 세미나, 음악회, 뮤지컬, 책자발간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해월당 봉려관 스님이 수행하셨던 해월굴 입구에서 합장을 올리고 나서 대웅전을 향해 느린 걸음으로 옮겼다. 대웅전으로 가는 계단 아래쪽에는 봉려관 스님이 심으셨다고 하는 백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한 여름의 시원한 그늘을 내주고 있다. 가을이면 노란색의 비단을 깔아놓을 땐 사부대중의 눈이 호강하고 마음도 호강할 것이 아닌가 하는 지나가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 등에 업혀서 절에 갔다. 하굣길에도 절문 앞을 수 없이 기웃거리며 다녔다.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끼며 어떻게 깨닫고, 절로 가야 하는지 모두가 궁금했다. 절은 왜 일주문에서 저렇게 시작되는 것이며, 대웅전은 왜 높은 계단을 밟아 올라가야 하게끔 지어져 있을까? 외적인 모습과 내적인 신성한 의미를 모르고 자랐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저 더 높고 더 넓은 깨달음으로, 저 절들이 지닌 의미와 뜻 속으로 아득히 먼 마음의 힐링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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