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수필 -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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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수필 - 인연
  • 김희정 시인
  • 승인 2021.08.0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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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정 시인 . 도서출판 뷰티풀마인드 대표
김희정 시인 . 도서출판 뷰티풀마인드 대표

인연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20년 전쯤이었죠. 모 도서관에서 청소년 독서토론 지도를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독서·논술이 사뭇 뜨거웠던 때였어요. 재능기부이니만큼 더 잘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군요.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모으고, 자료를 찾고, 도서목록을 검색하고 부지런을 떨고 있을 때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기사가 있었습니다.
대전의 한 고등학교 선생님이 독서지도에 관한 체계적인 매뉴얼을 만들어 놓았고, 그렇게 지도해서 상당히 활성화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그 분이 바로 차상학 선생님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용기죠. 일면식도 없는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물론 짐작대로 아주 흔쾌히 아무 조건 없이 모든 매뉴얼과 자료들을 복사해서 우편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잘 해보라는 응원과 함께요. 덕분에 저도 많이 배웠고, 그 때 그 학생들도 모두 행복한 독서토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그 중 한 학생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벌써 삼십대 후반이 되었고,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세월이 유수 같다는 흔하디흔한 말을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인연입니다. 독서·글쓰기 선생으로 현장을 떠난 지 10년도 훨씬 지난 어느 해, 곽지 해변의 작은 카레식당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가 바로 이은주 선생님입니다. 우리는  둘 다 손님이었고, 다른 손님이 없는 관계로 살짝 말문을 텄습니다.
“여행 오셨나봐요? 어디서 오셨어요?” 뭐 그런 흔한 안부였습니다.
그녀는 대전에서 왔다고 했고, 그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이거였습니다.
“어머, 그래요? 대전에 아는 분 있어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신데, 차상학이라고….”
그 이름을 듣자마자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까닭은 이렇습니다. 
20년 전에 차상학 선생님, 그 분의 제자인 그녀의 남편 그리고 그녀, 모두 대전에 교편을 잡고 있는 국어 선생님이며, 그녀의 남편 국어 선생님은 차상학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독서지도를 이어가고 있는 애제자였던 겁니다. 그렇게 10년 전에 우리는 차상학 선생님을 끈으로 아는 사이가 되었다가 또 한참 연락이 뜸했습니다. 한 5년쯤 서로 잊고 지냈지요. 
그러다 며칠 전 중년의 한 여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7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서요. 그 사이 휴대폰이 사고를 당해서 연락처가 지워졌다는군요. 7년 전처럼 역시 홀로 여행을 계획하고 곽지 해변에 민박집을 잡아 왔는데 하룻밤 사이에 주인 할머니가 응급실에 실려 갔고 돌아가실 것 같아 다시 숙소를 구해야 하는 사정이 생겼다는군요. 망설일 것 있나요? 저는 기꺼이 그녀에게 방 한 칸을 내어 주었습니다. 
차상학 선생님, 그 분이 지어놓은 복의 크기가 그 정도입니다. 물질이 아니고 마음의 크기니까요. 20년이 지나도 조금도 감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자가 붙어서 당신의 제자들이 쓰고도 남으니 이만하면 복! 지을 만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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