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신행수기 공모 최우수상 수상작 ⑥ - 개망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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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신행수기 공모 최우수상 수상작 ⑥ - 개망초의 꿈
  • 서경연 불자
  • 승인 2021.08.24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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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를 따라 온 것은 비단만이 아니었지요. 혜초의 등 뒤에 따라 온 것은 인도여행기와 고비 사막의 모래바람이었지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갠지스 강에서 물은 부활을 의미하며, 혜초의 등 뒤로 부는 천 년의 바람은, 사바세계 아버지의 굽은 등 뒤를 불어 지납니다. 기왓장처럼 굽은 아버지의 등은 이제 막 똑바로 일어설 것만 같습니다. 천 년의 세월이 눈 한 번 감았다 뜨는 찰나의 순간 같습니다.
사막의 불교에서는 색깔 있는 모래들로 만다라를 채우고, 맨 나중에는 그 모래를 바람에 다 날려야 비로소 만다라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여의고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으면 사람들이 극악하지를 못하니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하니, 얼핏 보기에는 사람들이 좀 모지란 듯 보일 수도 있느니라.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치열한 자기 수행 끝에 나온 것인지를 사람들은 잘 모르니라.”  
평생토록 불교신자였던 아버지는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말씀을 일러 주셨습니다. 제가 심장이 아파 병원에 입원해 있던 날, 아버지는 이 한 말씀을 하시고 곧장 집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저는 병원 밥을 먹기 시작했고, 침대 주위를 걸어 다녔습니다. 세상이 다 끝난 것은 아니라고, 세찬 봄비에도 지천으로 핀 개망초는 제 식구를 늘려가며 천덕꾸러기일망정 살아있다고, 세상에는 뭇 생명들이 내는 기척들로 어질하였습니다. 비를 만난 인연으로 꽃은 피고, 부처님 나라에는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시절 인연을 만나 저마다 최선을 다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아무 것도 못난 것이 없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어릴 적, 어느 삿갓 쓴 스님이 “너는 갓을 두 번 쓰겠구나. 나 따라 가서 스님이 되지 않으련?” 하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자라면서 내내 그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갓은 양반들이나 쓰는 것이니, 내가 벼슬아치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살아보니 그 의미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젊었을 적, 군복무를 마치고 서울 조계사에서 잠시 허드렛일을 돕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찬물에 걸레를 빨아서 법당을 닦고 있는데, 한 스님이 “며칠 째 찬물에 걸레질 하는 것을 보았는데, 손이 시리지 않느냐?”고 물어보셔서 아버지는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셨답니다. 스님은 조계사 종무소에 아버지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아버지는 연등 접수도 받고 사무도 보고 그렇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들을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머리를 깎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이 성글어서 그랬는지 아버지는 결국 머리를 못 깎고, 취직하고 결혼하여 평범한 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바세계에 살면 살수록 아버지의 불심은 더욱 더 깊어갔습니다. 새벽이면 대문을 열고 천수경과 이산 혜연 선사 발원문을 켜 놓고 백팔 배를 올렸습니다. 어떨 땐 저도 아버지 옆에 서서 단풍잎만한 손바닥으로 같이 절을 올렸습니다. “흉년 드는 세상에는 쌀이 되어 구제하고”이 발원을 저는 특히 좋아했습니다. “남의 눈에 잎이 되고 꽃이 되어라.”는 축원을 아버지는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는 “인욕 정진”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에 가다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뺨을 맞아도, 아버지에게 맞았다고 생각하고 그냥 가던 길을 가라고, 절대 맞서 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늘 참고 늘 손해보고 늘 뒤에 서서 그렇게 팔십 평생을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불국사를 좋아하셨고 때로는 단풍이 든 불국사 책받침을 사 주셨습니다. 책받침 속, 구품연지로 흘러드는 불국사 청운교의 둥근 돌다리를 저는 아직 기억합니다.

엄마는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래 전 스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갓은 상주의 삼베두건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의 49재는 엄마의 고향에 있는 조그마한 절에서 올려 졌습니다. 이른 봄에서 봄의 중순으로 넘어가던 무렵, 엄마의 넋은 좋은 곳으로 천도되었습니다. 
포르르, 새 한 마리가 절 지붕을 넘어 날아갔습니다. 심장이 아파서 늘 입술이 보라색이었고, 빨리 걷지도 빨리 뛰지도 못했던 엄마는 비로소 자유를 찾은 듯 했습니다.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고, 새어머니는 성격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습니다. ‘설움을 받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엄마가 없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충분히 느껴야 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중간에서 얼마나 난처하셨을까요?
그 때까지 내 머리도 내 손으로 감아 본 적이 없던 저는 아침에 쓰레기차가 오면 다라를 이고 달려야 했습니다. 계란 프라이 하나도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고 먹어야 했습니다. 울면 운다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 소리에 저는 심장병을 얻었습니다. 아버지는 입맛을 다시며 밥숟갈을 슬며시 내려놓으시곤 했습니다. 한 집에 사니까 우리 가족은 아마도 업(業)이 비슷했을 거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국가에게도, 민족에게도 팔자가 있듯이 모여 사는 우리 가족에게도 공통된 팔자가 있었을 거라고 저는 이제야 생각합니다.

제가 다니는 절에는 전통 시장이 인접해 있습니다. 시장 상인들은 가게 문을 열기 전 지극정성으로 새벽 예불에 참석합니다. 앞치마를 둥글둥글 말아서 방석 옆에 놓아두고 귀에 바짝 손바닥을 갖다 대고 절을 올리는 그들이 저의 스승입니다. 반야심경을 마치고 아직은 어두운 대웅전 밖을 나서며 한 아주머니가 말씀하십니다.
“부처님, 내일은 장날이라서 못 옵니다. 내일은 기다리지 마세요.” 
“그런데 부처님, 오늘따라 왜 그리도 웃으십니까?”
경내에는 잔잔한 웃음이 둘러 퍼집니다. 각양각색, 부처님께 올리는 마음이나 형식은 제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눈을 반 쯤 뜨고 웃으실 뿐, 잘잘못을 따져서 벌주는 부처님이 아닙니다. 본디 좋은 것도, 본디 나쁜 것도 없는 마음자리에서 부처님은 웃고만 계십니다. 저는 이제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부처님의 웃음이 보입니다. 저는 한 때 ‘입으로만’ 신자였습니다. 마음에는 욕심이 가득차서 남들보다 돋보이고 싶었고, 남들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싶었습니다. 스님과의 신행상담 자리에서도 고상한 체 하느라, 다른 이의 눈물 어린 사연을 나눌 시간도 빼앗았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저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었고, 언제나 모임의 중심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에게는 피아노 레슨 선생님, 불교 신자, 책 많이 읽는 사람으로 불리고 싶었습니다. 어릴 적 “남의 눈에 잎이 되고 꽃이 되어라.”던 아버지의 축원에 저는 스스로 걸려 넘어졌던 것입니다. 허영과 교만의 치심(痴心)을 누르고, 본래 그 맑은 자리를 찾아 스스로 빛나라는 말씀을 저는 거꾸로 실천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편이 훨씬 쉬웠기 때문입니다. 습(習)에 젖어 살며, 그것이 저의 본모습이라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장아장 걸음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다니기 시작한 절을 저는 떠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부처님 생각이 먼저 났습니다.

지금도 저의 아버지는 부처님 슬하에서 살아가십니다. 며칠 전에는 경주를 다녀오셨는데,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가깝지 않은 거리를 걸어서 올라갔다고 하셨습니다. 쉬이 가면 그건 세속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절양장 같이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서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한평생 부처님과 같이 살아온 세월에 여한은 없었노라고 말하고 싶으셨던 걸까요?
집 위 계곡에 물이 흐르고 그 곳에 절이 있어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절에 다니셨다고 합니다. 세상 시비를 다 털어내고 오로지 물 흐르는 소리 하나 만으로 깊어지는 계곡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이제 그 물을 닮고 싶었을까요?
아버지는 만만치 않은 인생을 사셨지만, 87세의 세상 나이로 귀먹고 눈멀어 가지만, 모아 쥔 두 손에는 울퉁불퉁한 정맥위로 언제나 단주가 걸려 있습니다. 다음에도 혹 몸을 받아 나신다면, 다른 건 몰라도 꼭 불교 국가에서 태어나고 싶다는 아버지의 소박한 바람도 이루어지실 거라 믿습니다.   
댕댕댕.
풍경이 웁니다. 비로소 절 마당은 깨어나 기척을 부립니다. 능소화는 폭포수같이 늘어진 가지마다 주홍색 꽃을 달고 섰습니다. 이팝나무는 쌀밥 한 공기 같은 꽃송이들을 달고 흐뭇하게 서 있습니다. 배롱나무는 아직 꽃봉오리를 피워 올리지 못했습니다. 이 봄, 굳이 구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가 화장 세계입니다. 모두 저답게 피어서 저답게 집니다. 다른 누구의 삶도 흉내 내지 않고, 다른 누구의 삶도 시기하지 않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완성된 이 화장 세계에서 당신이 피워 올리는 꽃은 무슨 빛깔입니까?

금강계단, 봄볕 아래서 아버지가 웃습니다. 팔십 평생 부처님의 가피로 살아 왔다고, 다소곳한 절의 봄볕 아래서 아버지가 웃습니다. 
저는 부처님을 지척에 두고도 그 뜻과는 반대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난 모든 이가 다 저의 눈(目)부처였고, 제가 만난 모든 현실이 다 저의 스승이었다는 것을.  
오늘도 부처님 전에 엎드려 기도드립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무 것도 욕심 내지 않게 해 주십시오. 비록 세상의 비천한 일을 하고 살아도 그것은 그 사람의 겉모습, 육신의 일 일 뿐, 마음속의 일은 부처님 믿는 일이라는 것을 세세연년 변치 않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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