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26] - “마치 西天의 寶林山과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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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26] - “마치 西天의 寶林山과 같도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8.24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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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 遊境內ᄒᆞ샤 山水勝處에 輙憩止ᄒᆞ야 遂成蘭若ᄒᆞ니 一十三所╷러라 今曰花果院이 隷籍寺門ᄒᆞ니 茲寶林道場이니라 亦先是西國智藥三藏이 自南海로 經曺溪口ᄒᆞ야 掬水而飮ᄒᆞ니 香美異之커ᄂᆞᆯ 謂其徒曰호ᄃᆡ 此水╷ 與西天之水로 無別ᄒᆞ니 溪源上애 必有勝地ᄒᆞ니 堪爲蘭若╷로다코 隨流ᄒᆞ야 至源上ᄒᆞ야 四顧ᄒᆞ니 山水╷ 回環ᄒᆞ며 峯巒이 奇秀커ᄂᆞᆯ 嘆曰호ᄃᆡ 宛如西天寶林山也╷로다ᄒᆞ고 

【諺解】仙이 닐오ᄃᆡ 和尙 法力이 넙고 크샤ᄆᆞᆯ 아ᅀᆞᆸ과ᅌᅵ다 오직 내 高祖ㅅ 墳墓╷ 다 이 ᄯᅡ해 잇ᄂᆞ니 他日ᅌᅦ 塔 ᄆᆡᇰᄀᆞᄅᆞ실 제 幸혀 ᄇᆞ라ᅀᆞᅌᅩᆫᄃᆞᆫ 머믈워 두쇼셔 나ᄆᆞ닌 願ᄒᆞᆫᄃᆞᆫ 다 ᄇᆞ려 永히 寶坊을 사모리ᅌᅵ다. 【寶坊ᅌᆞᆫ 뎔이라】 그러나 이 ᄯᅡ히 生龍白象來脈이라 오직 하ᄂᆞᆯᄒᆞᆯ 平ᄒᆡ올 ᄲᅮ니언뎡 ᄯᅡ 平ᄒᆡ오ᄆᆞᆫ 올티 아니ᄒᆞ니ᅌᅵ다 寺ᄅᆞᆯ 後에 지ᅀᅩᄃᆡ 젼혀 그 마ᄅᆞᆯ 브터 ᄒᆞ니라 (陳亞仙이 이르되, “和尙의 法力이 넓고 크심을 알겠습니다. 오직 내 高祖의 墳墓가 다 이 땅에 있느니, 다른 날에 塔을 만드실 때 행여 바라는 것은 남겨 두십시오. 남은 것은 원하건대 다 버려서 영원히 寶坊을 삼을 것입니다 【寶坊은 절이다.】.” 그러나 이 땅은 生龍과 白象이 온 脈이어서 오직 하늘을 평평하게 할 뿐이언정 땅을 평평하게 함은 옳지 아니합니다. 후에 절을 짓되 오로지 그 말을 근거로 하였다.

【解說】⑴ 蘭若: 阿蘭若의 준말. 阿練若로 쓰기도 한다. 梵語 araniya의 음사. 한가하고 고요하여 比丘의 수행에 적당한 곳으로, 義譯하면 寂靜處·空閑處·遠離處 등이다. 
⑵ 一十三所: ‘所’는 ① 명사로 쓰여 ‘장소’를 나타낸다고 한다. ② 그러나 사실 이곳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量詞로 쓰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古代漢語에서는 量詞가 없었기 때문에 명사의 개수를 셀 때는 ‘一人’과 같이 수사를 명사의 앞에 직접 붙여 썼으나, 몇몇 명사가 양사로 변하여 ‘人一個’와 같이 명사 뒤에 數量詞(수사+양사)를 붙여 썼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수량사가 명사 앞으로 자리를 옮겨 ‘一個人’과 같은 구조를 갖게 되었다. 위의 문장은 두 번째 단계인 ‘명사+수량사’의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즉 이것을 現代漢語의 방식대로 다시 쓴다면 ‘一十三所蘭若’가 될 것이다. [예문] ① 場所 / 住所 / 哨所(초소) / 厠所(변소) / 各得其所.(각기 그 장소가 있다. 즉 모든 사람이나 사물은 적절한 자리가 있다.) 
⑶ 掬水而飮: ‘掬’는 ‘움켜쥐다’라는 뜻도 있지만, ‘손바닥’이라는 뜻도 있다. 즉 이것은 “智藥三藏이 南海로부터 曺溪의 어귀(洞口)를 지나가면서 바가지와 같은 도구가 없이 손바닥에 물을 받아 마시는 동작을 나타내는 것이다.
⑷ 香美異之: ‘香美異之’에서 ‘香·美·異’ 등은 모두 형용사인데, 목적어 ‘之’가 따른다. 목적어는 他動詞 뒤에만 쓰여야 하는데, 이와 같이 형용사나 자동사 등의 뒤에 쓰이면, 형용사나 자동사 등이 使動動詞나 意動動詞로 轉成된다.
⑸ 堪爲蘭若: ‘堪’은 ① 본래 ‘地面이 돌출한 곳’이다.『說文·土部』에서 “堪, 地突也. (堪은 땅이 돌출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段玉裁는 注에서 “地之突出者曰堪. (땅의 돌출한 곳을 堪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② 이것으로부터 引申되어 ‘높다(高)’라는 뜻이 되었고, ③ 나아가서는 ‘…할 수 있다, …할 만하다.’ ④ ‘견딜 수 있다, 감당할 수 있다, 이겨낼 수 있다.’ 등의 뜻도 있다. 여기에서는 ③을 따라 해석하겠지만, ①을 따라 “[저 殊勝한 땅에서] 地面이 돌출한 곳을 蘭若(수행처소인 도량)로 하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다’나 ‘…할 만하다’라는 뜻이라면 ‘可’를 쓸 수도 있었을 터인데, 굳이 ‘堪’을 써서 重義法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문] ③ 堪稱楷模. (모범이라 할 만하다.) / 其年 恰卄四歲 滿三年限 便欲造南明求決 那堪逼夏 諸鄕人 亦不容 『禪要28』 (그 해는 마침 24歲인지라, 三年의 期限을 채웠습니다. 문득 南明寺에 나아가 확정해주는 것(認可)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어찌 여름을 위협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 고향사람들도 역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 祖曰我喚作一物 尙不中 那堪喚作本源佛性 『佛祖直指心體要節』 (6조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한 물건이라고 부르는 것도 오히려 맞지 않거든, 어찌 능히 本源과 佛性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 直是無你用心處 遮箇最是省力 而今學此道者 多是要用力求 求之轉失 向之愈背 那堪墮在得失解路上 謂鬧處 失者多 靜處 失者少 『書狀·答 劉通判 彦冲 又』(바로 당신이 마음 쓸 곳이 없어야, 이것이 가장 힘을 덜 들이는 것(쉬운 것)이거늘, 지금 이 道를 배우는 사람은, 대부분 힘을 써서 구하고자하나니, 구하면 더욱 잃게 되고, 향하면 더욱 등지게 되리니, 어찌 得失을 따지는 알음알이의 길 위에 떨어져 있으면서, 시끄러운 곳에서는 잃는 것이 많고, 고요한 곳에서는 잃는 것이 적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今爲汝等 說法 不付其衣 蓋爲汝等 信根 淳熟 快定無疑 堪任大事 『六祖法寶壇經』 (이제 너희들에게 法을 말하지만 그 옷을 맡기지 아니하느니, 대체로 너희들의 근본적인 믿음이 흠뻑 익어, 결정코 疑心이 없어, 큰일을 감당할 만하기 때문이니라.) ④ 不堪凌辱. (모욕을 참기 힘들다.) / 如上所述管見 莫不皆是藜藿之類 飽人 不堪供養 以俟絶陳之流 終有一指之味 『禪要7』 (위와 같이 기술한 [보잘것없는 나의] 管見은, 모두 명아주와 콩잎[으로 만든 좋지 않은 음식]이 아닌 것이 없는지라, 배부른 사람은 감히 먹으려하지 않고, 陳나라에서 [양식이] 끊어진 무리를 기다리니, 끝내 한 손가락의 맛은 있으리라.) / 到者裏 設要知非悔過 別立生涯 直須盡底傾出 三回四回洗 七番八番泡去 敎乾乾淨淨 無一點氣息 般若靈丹 方堪趣向 『禪要17』 (여기에 이르러, 만약 그릇된 것을 알고 과오를 참회하여, 따로 다른 생애를 세우고자(살고자) 할진댄, 즉시 바닥까지 깡그리 기울여 쏟아내고, 세 번 네 번을 씻으며, 일곱 번 여덟 번을 거품을 내어, 깨끗하게 하여, 한 점의 氣息도 없게 하여야만, 般若의 靈丹(신령한 약)은, 비로소 [그것을] 갖고자하는 마음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거니와,)
⑹ 宛如: 동사로 ‘흡사 …같다.’라는 뜻이다. [예문] 她長得宛如西施一般. (그녀는 정말 서시처럼 생겼다.) 
위를 정리하여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飜譯】대사께서 境內를 돌아다니시다가, 山水가 殊勝한 곳에서 문득 멈추시니, 마침내 蘭若(수행처소) 13곳이 이루어졌다. 지금은 花果院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을] 절의 문에 붙여 적었는데, 이곳이 菩林道場이다. 또 이 보다 먼저 西國의 智藥三藏이 南海로부터 曺溪의 어귀(洞口)를 지나다가 물을 손바닥으로 [한 모금] 움켜 마시니, 향기롭고 [맛이] 좋고 기이하다고 여겨(향과 맛이 뛰어나다고 여겨) 그의 제자에게 이르되, “이 물은 西天의 물과 다르지 않으니, 시냇물 근원의 저 위에는 반드시 殊勝한 땅이 있을 것이므로, 蘭若(수행처소인 도량)를 만들 수 있을 것이로다.”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흐름을 좇아 근원에 이르러 사방을 돌아보니 山水가 감아 돌며 산봉우리(峯巒)가 奇異하고 빼어나므로 讚嘆하여 이르되, “마치 西天의 寶林山과 같도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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