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신행수기 공모 최우수상 수상작 ⑦ 관세음, 세상의 소리를 관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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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신행수기 공모 최우수상 수상작 ⑦ 관세음, 세상의 소리를 관觀하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8.3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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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련 불자

저에게 허락된 복락이 있다면, 그것은 이생에서 불심 도타운 부모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보실라 홀로 있어도 나쁜 생각과 태도를 경계하라’ 고 하셨던 부모님이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봄날, 오원 한 닢도 아끼시는 아버지가 염불을 듣기 위해 미니 전축을 사셨습니다. 아버지로서는 생애 처음 구입한 문화용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LP판이 돌아가며 마치 아가 옹알이 같은 염불이 흘러 나왔기 때문입니다. 듣고 있던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업장이 두꺼워서 전축 하나를 사도 불량품을 고른다. 꼭 하필이면 이런 것이 나한테 온단다.”
그러나 옆집 전파사 아저씨가 오셔서 당장에 전축을 고쳐주셨습니다.
전축에는 33피트와 45피트를 조절하는 스위치가 있었는데, 우리 전축의 스피드는 33회전에 맞춰져 있었고, LP판이 빨리 돌아가며 아기 옹알이 소리를 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습니다. 모두가 제 위치로 돌아가고 난 후에 아버지는 반야심경을 틀었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뿌듯함이었습니다. 배고프고 가난했던 시절을 벗어나, 절에 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염불을 들을 수 있다는 기적 같은 사실에 아버지는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께는 불운이 더 손쉬운 선택일 만큼 아버지의 인생은 참으로 고단하였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고아원 화장실 청소를 하며 숙식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어떤 힘든 순간에도 부처님만은 놓지 않고 살았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어머니는 사십 평생 글자를 모르셨습니다. 열 두 형제의 세 번째 딸로 태어난 엄마는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엄마는 돈을 알아보고 돈을 헤아리고 시장에서는 물건 값을 흥정하기도 했습니다. 엄마의 걱정은 오로지 ‘내 새끼들에게 오늘은 뭘 해 먹이나?’ 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때는 반장 집으로 집집마다 수도세 고지서가 나왔습니다. 엄마는 언제나 저에게 고지서를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니도 있고 동생도 있는데 내가 왜 하느냐고, 할 때마다 저는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만약 엄마가 저에게 글자를 모른다고 그랬다면 저는 두 말 없이 고지서를 돌리고, 한글을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엄마가 아는 건, 오로지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는 것 하나 밖에는 없었습니다. 초하룻날이나, 보름에 엄마는 절에 쌀을 이고 가며 한 번도 쌀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공양미는 그래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불경 한 줄 읽지 못한 까막눈이었지만 엄마는 길을 걸을 때도, 하늘의 까마귀가 까악까악 울 때도, 졸음이 올 때도 엄마는 늘 관세음보살님을 찾았습니다. 관세음(觀世音), 세상의 소리를 관(觀)하다.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본다.’의 의미를 엄마는 몰랐겠지만, ‘듣는다.’는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라면, ‘두루 살펴본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연민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마흔이 넘은 저는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아침이면 우리 온 식구는 칫솔을 물고 마당의 수돗가에 모여 양치를 했습니다. 아침은 그렇게 눈부셨습니다. 그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삼월의 어느 날, 엄마가 쓰러졌습니다. 저녁상을 물리고 한참 지나서 엄마는 엉금엉금 기어서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아이고, 내가 왜 이렇소?” 엄마는 이미 왼쪽 수족이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처음 보는 엄마 모습에 그만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앰뷸런스를 불러놓고 기다리는데, 엄마는 정신도 온전치 않은지 자꾸 헛말을 했습니다. 자기 팔이 세 개니 하나는 잘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보고 너희들이 누구냐고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물어보았습니다. 우리는 새삼 엄마가 무서웠습니다. 정을 떼놓고 가려 하니,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고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습니다. 
학교 갔다 오면, 엄마는 늘 어두컴컴한 안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대청마루 안으로 쭉 들어간 안방은 낮에도 눅신한 어둠이 괴괴히 고여 있었습니다. 엄마는 백팔 염주를 목에 걸었다가 오른손으로 돌렸다가 그렇게 하루를 보냈습니다. 어떨 땐 울기도 했습니다. 책상 다리를 붙잡고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서 보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엄마는 수시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는데, 동생과 저는 환자복을 입고 링거를 맞는 엄마가 낯설어서 자꾸 웃음이 났습니다. 엄마는 왜 웃느냐고 물으시는데 동생과 나는 웃기만 했습니다. 배가 당기고 아파서, 나중에야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습니다.  

안방에는 지린내가 나서 아무도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원효 대사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맛있게 마셨던 물이 해골바가지의 물이었다니, 모르고 먹었을 때는 어떤 역겨움도 불러오지 않았는데, 아침이 밝고 나니 비로소 해골물이란 걸 알고 원효대사는 구역질을 하다가 깨닫게 되었지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요. ‘삶’은 자신의 해석에 달려있고, 그 해석에 따라 각자의 삶은 구체화 된다는 것을요.
병원에서는 아버지 보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합니다. 길어봤자 1년이라고 했다 합니다. 아버지는 새벽마다 일어나 염불을 틀고 책장에 놓여진 약사여래불 사진을 향해 108배를 올리셨습니다. 저도 따라서 절을 하다가 가만히 아버지 뒤에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어렴풋이 엄마가 그 해 겨울을 나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슬펐지만, 엄마의 육체적 고통이 줄어들 수 있다면 그래도 괜찮다고 저를 달랬습니다. 사실, 저는 엄마가 창피했습니다. 친척들이 한 번씩 다녀가셨는데, 너나없이 안방 문을 열면 코부터 찡그렸습니다. 머리는 감지 않아서 한 여름 옥수수 쉰내 같은 것이 났습니다. 나는 부디 아무도 우리 집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었습니다. 그러나 그 못된 소원을 부처님께서는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해 12월 29일, 신년을 사흘 앞두고 엄마는 눈을 감았습니다. 친척 아저씨가 지붕 위에 올라가 엄마의 이름을 크게 불렀습니다. 새파란 겨울 밤하늘 속으로 엄마의 혼은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엄마의 산소는 고향집 절 뒤, 나지막한 언덕에 있습니다. 새벽 예불부터 저녁 예불까지 엄마는 매일 염불 소리를 들으며 이승에서 하지 못했던 불경 공부를 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가끔 잠 안 오는 밤이면, 엄마는 모로 돌아누우며 이승에 두고 온 자식들의 나이를 세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엄마의 세속 나이를 짚어 절에서 엄마의 환갑도 올려 주셨습니다. 차  멀미를 심하게 해서 엄마는 죽을 때까지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늘 지갑에 엄마 사진을 넣고 다닙니다. 서울을 갈 때도, 외국 출장을 나갈 때도 엄마는 늘 저와 함께 합니다. 좋은 풍경, 아름다운 정취를 만나면 저는 속으로 엄마에게 물어 봅니다.
“엄마. 거기는 더 좋겠지만 여기도 괜찮지?”
대답은 바람 소리로 대신 합니다.

“조상 윗대부터 대대로 부처님의 가피가 도타운 집안이다. 가난했지만 불심은 깊어서 자식들이 다 잘 되었다. 저승 가서도 조상님들께 드릴 말씀은 있다.”
아버지는 산을 오르며 말씀하십니다. 뒷짐을 지고 걷는 아버지의 두 손에는 구절초 꽃들이 소담합니다.
“아버지. 지금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중에 <뒤를 돌아보는 원효>라는 입상이 있대요. 설총이 그의 아버지 원효대사의 유골을 진흙과 섞어서 만들었는데, 설총이 아버지하고 불렀더니 원효대사가 반 만 돌아봤대요.” 
“이승과 저승의 경계도 단박에 허물어 버린 분이셨구나. 아버지는 아직도 세속에 미련이 많아서 그것이 잘 안 된다. 집착이나 미련은 이를테면 잡초 같은 것인데, 그것을 솎아 내는 것이 일평생 참 힘들구나. 아니, 잡초는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관점에서 분류한 거니까, 불교신자는 그렇게 부르지 말아야지.”
엄마의 산소 앞에서 우리는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저 아랫동네에 드문드문 불이 켜지고, 절에서는 불공드리는 소리가 울려 나왔습니다. 그윽한 음성 공양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극락정토와 사바세계는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현실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우리는 절을 향해 합장하며 오분향례를 올렸습니다. 
산그늘이 무심히 내려와, 승과 속의 경계를 천천히 지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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