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신문이 만난 사람 - 불광사 주지 지범 스님 “부모은중경 노래로 부르며 포교에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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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신문이 만난 사람 - 불광사 주지 지범 스님 “부모은중경 노래로 부르며 포교에 앞장”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8.3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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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님은 그랬었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열아홉에 첫 아들을 낳은 故 대덕화보살이시다. 귀하고 귀하게 얻은 아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버리고 만다. 그 이후에도 여섯 자식 모두가 서른을 넘기지 못했다. 보살에게 열세 살의 막내아들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열세 살의 막내아들을 백양사에 출가시키고 ‘나무아미타불’ 정진으로 무병장수하기를 기도하며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어머니 보살의 지극한 정성의 덕으로 부처님의 불음(佛音)으로 부처님 법을 전하고 있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불음의 ‘부모은중경’ 효의 소리가 바닷바람을 타고 극락세계를 향해 날아간다.
기타와 목탁소리에 타고 넘는 소리다. 품에 품고, 고통을 이기시고 자식 낳고 근심을 잊으시며,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어 먹이는 은혜,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는 ……. 부모의 은혜 십대은(十大恩)이 독경과 낭송으로 멀리 멀리 퍼져나간다.
불음을 전파하는 막내아들이 바로 불광사의 주지 지범 스님이시다.
어머님의 한 없는 사랑으로 감동을 주었던 지범 스님을 제주불교신문의 특별기획으로 만나봤다.
/편집자주
불광사 대웅전
불광사 대웅전

 

▷스님, 한마디로 남원읍 하례리 불광사는 바닷바람이 소나무 숲 사이로 달빛과 함께 스며드네요. 참 아름답고 편안한 마음이 듭니다. 스님께서는 이 불광사를 언제 창건하게 되었는지요.
▶예. 역사는 오래되지 않습니다만, 1978년 성우 스님이 창건을 하셨습니다. 계룡산에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제주에 절을 짓고자 절터를 찾아서 도일주를 했었다고 들었습니다. 때마침 지금의 불광사 자리에 이르렀을 때 이 언덕이 금구포란(金龜抱卵)의 형세라 보았답니다. 거북이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라는 거죠. 상서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스님께서는 언제 이 불광사에 부임하게 되셨는지요.
▶1998년에 정찬 스님이 주지로 이어받아 기도와 명상하는 도량으로 정진해오면서 이후에 제가 이 도량을 인도해나가고 있습니다.

불광사 주지 지범 스님
불광사 주지 지범 스님

 

▷스님께서는 13세에 백양사로 출가하셨다고 전해들었습니다만.
▶예. 그렇습니다. 열세 살에 백양사로 출가해서 서옹대사를 은사로 득도하고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 4년을 수료한 후 선운사, 대흥사에서 안거에 들어 본격적인 수행을 해오다가 1983년에 제주에 들어오면서 법화사에서 총무의 소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법화사에서 시몽스님과 연(緣)를 맺고, 조카가 되는 일미(一彌) 스님은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현재 미국 예일대학교 동양 종교학 연구소장으로 있습니다. 속연의 큰형 아들인 조카가 바로 일미 스님입니다. 
▷스님께서는 언제부터 불음에 관심을 갖고 정진하게 되셨는지요.
▶예. 백양사의 방장으로 계셨던 서옹 대사는 절보고는 말은 조금 어눌한 편인데, 노래 부를 때는 훌륭한 목소리 갖고 타고 났다고 칭찬해 주신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래서 제가 1983년에 군 제대를 마치고 연예인단으로 구성된  ‘불음 보급회’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아시아 레코드사에서 오디션을 받은 것이 불음에 본격적으로 출발하게 된 셈이죠.
깜박 잊었는데요. 제가 군복무시절에는 군법당을 만들어 줄 것을 건의했고, 군법당이 생기면 자연적으로 찬불가를 부를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찬불가를 부를 때는 어떤 느낌을 갖게 됩니까.
▶예. 수많은 관객 앞에 서면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고 신명이 나고 기운이 넘쳐납니다. 
신기한 일로 느껴집니다. 저 스스로가 부처님이 가피로 내려준 노래가 구원의 빛으로 받아드리고 싶습니다.

 

▷스님께서는 공연무대를 많이 마련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도내에서는 1994년 처음으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찬불가 공연무대를 마련했는데, 성황리에 마무리 되면서 이를 계기로 찬불가가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부른 찬불가는 합창단들에게도 기폭제가 되어 행사 때마다 합창단들이 찬불가를 불음으로 봉행하게 이르게 됩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 공연활동을 펴왔습니다. 미국 뉴욕에서도   ‘부모은중경’을 레퍼토리로 공연을 갖기도 했습니다. 
▷공연활동만이 아니라 음반도 제작해서 지금까지 6집까지 나와 널리 보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얻는 수익금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예. 찬불가를 비롯해서 경전을 카세트와 CD를 내어 전국에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얻어지는 수익금은 전부 포교를 위한 기금으로 쓰도록 판권을 음반사에 맡겨 두었지요. 모두 40여 곡을 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스님께서는 재능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진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개인전도 연 것으로 기억됩니다. 어떻습니까.
▶예. 부처님의 8도 성지를 순례한 발자취를 담아내 2006년도 한 갤러리에서 일주일 동안 전시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으면 남방불교지역에 대한 순례를 사진에 담아보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오늘 스님을 만나 뵙고는 들어야할 얘기, 듣고 싶은 얘기,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만, 지면 관계로 다음 기회에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람해봅니다. 
/김익수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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