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가르침따라 행복한 삶 추구하길…”
상태바
“부처님 가르침따라 행복한 삶 추구하길…”
  • 김은희 기자
  • 승인 2021.09.07 13: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시대의 선지식 고우 스님 입적
문경 봉암사에서 수좌회장으로 치러
고우 스님 생전 모습
고우 스님 생전 모습

 

다비장으로 향하는 수좌스님들.
다비장으로 향하는 수좌스님들.

“우리는 왜 불교를 믿는가?”
우리 시대의 선지식이었던 고우 스님이 불자들을 위해 펼치신 ‘선요’ 강의에 앞서 진지하게 던진 질문이 가슴 깊게 와 닿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우 스님은 불교공부에 앞서서 우리가 부처님의 어떠한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할 것인가를 깊게 생각해야 한다면서 모든 외적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추신 부처님께서 왜 출가를 해서 6년이란 세월을 고행하셨는지를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참으로 행복한 삶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깊게 생각해서 그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할 수 있어야 진짜 날마다 행복한 날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평생 수좌로 사시면서 한국불교의 전통인 간화선 수행을 널리 대중화하는데 크게 힘쓰셨던 고우 큰스님께서 지난 8월29일 경북 문경 봉암사에서 입적하셨다. 장례는 전국수좌회장으로 치러졌으며 다비식은 9월2일 오전 10시30분 봉암사에서 봉행됐다. 
1937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20대에 폐결핵 요양을 위해 김천 수도암을 찾았다가 그 길로 출가했다. 1968년에는 선승 도반들과 함께 6·25전쟁 이후 맥이 끊긴 문경 봉암사의 선원을 재건하고, 한국불교 수행 전통을 살리는 ‘제2차 봉암사 결사’를 주도했다. 
10·27법난 시에는 조계종 총무부장을 맡아 원만한 수습과 종헌 개정 등 일대 개혁 조치를 한 뒤 3개월만에 다시 봉암사로 돌아왔다.

고우 스님이 입적하신 문경 봉암사 동방장.
고우 스님이 입적하신 문경 봉암사 동방장.


이후 한국불교의 유구한 참선 수행을 바르게 하고 선을 널리 전하기 위해 적명 스님과 함께 선납회(현 전국선원수좌회)를 창립하고 공동대표를 맡아 1987년 “참선 수행자도 경전과 조사어록을 공부하여 정견을 갖춰야 한다.”는 입장에서 해인총림에서 전국 선승들과 함께 제 1회 선화자 법회를 주도하였다. 이때 당시 종정이었던 성철 스님이 『육조단경』 지침 법문을 하고 서암 스님이 『육조단경』 강의, 일타 스님이 『율장』 특강을 하여 수좌 5백여 명이 수일동안 탁마 정진하였다. 이는 선문에서는 보기 드문 법회로 당시 선풍을 새롭게 진작시켰다. 2002년 각화사 태백선원 선원장을 맡아 결제 대중이 15개월15시간 가행정진 결사를 하게 이끌었다. 

고우 스님 다비식
고우 스님 다비식

 

이즈음 국내에 남방불교의 팔리어 경전이 번역 소개되고 초기 경전과 위빠사나 수행, 티베트 불교 수행이 도입되면서 화두 참선과 충돌이 일어나 대중이 혼란스러워하자, 선원수좌회의 공의를 모아 무여, 혜국, 의정, 설우 스님과 조계종 교육원의 지원으로 2005년 『조계종 수행의 길, 간화선』을 편찬하여 화두참선의 현대적인 지침을 제시하였다. 
2006년 봉화 금봉암을 창건하여 주석하며, 제방에서 선 법문 청이 오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갔다. 2007조계종 원로의원에 추대되었고, 대종사 품계를 받으셨다. 종단 원로가 되어서는 종단의 청정 종풍을 진작하기 위해 애쓰셨고, 불교가 세상에 도움이 되려면 불자들이 부처님이 깨친 중도를 공부해서 정견을 갖추고 실천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2011년 간화선과 위빠사나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조계종 한국문화연수원이 주최한 간화선 위빠사나 국제연찬회에 간화선을 대표하여 참석하여 위빠사나를 대표하는 미얀마 파욱 스님과 2박3일동안 문답 대화하였다. 평소 부처님이 깨친 중도를 화두로 참구하여 깨치는 길을 가장 지름길이라 보았지만, 염불이나 위빠사나, 지계와 보시, 봉사 등도 불교수행으로 다같이 평등하다고 보았다. 
스님은 평소 “한국불교의 선이 세계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시며 “중국은 공산화와 문화혁명으로 선맥이 단절되었고, 일본은 의리선으로 변절되었고, 오직 한국불교 조계종만이 조사선, 간화선풍의 원형을 전승하고 있다”고 하셨다. 또 앞으로 세계에서 한국 간화선풍을 주목할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하였다. 이 때문에 종단 차원에서 국제 선센터를 세워 간화선 인재를 양성하기를 발원하셨고, 선원수좌회 차원에서 봉암사 인근에 세계명상마을 건립을 적극 성원하였다. 2012년 조계사 선림원 증명법사에 추대되어 불교인재원과 더불어 서울 도심에서 재가자들에게 중도 정견과 화두 참선을 안내하는 데 애쓰셨다. 특히 백일법문 대강좌에는 수백 석 강의장이 꽉차서 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전국수좌장으로 치러진 고우스님 장례식.
전국수좌장으로 치러진 고우스님 장례식.

 

스님은 평소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는 입장에서 절에 제사와 불공을 일체 하지 않았는데 왜 절에 연등을 켜지 않느냐고 물으면 외형의 등 공양도 좋지만, 마음의 등을 밝히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셨다. 또 절 아래 마을 사람들이 세운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낡아 새로 짓는다고 하자 선뜻 적지 않은 돈을 보시하셨다. 어린이들을 좋아하여 절에 아이들이 오면 남모르게 용돈을 주거나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셨다. 
80세가 되어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자 이제는 은퇴할 때라며 일체 대중을 만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손수 빨래를 하시고 검소하게 소욕지족으로 사셨는데 말년에 스님은 가까운 이들이 안부를 여쭈면 “폐결핵으로 죽으려고 절에 왔는데, 불교를 만나 병도 낫고 지금까지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하시며 “아무런 여한이 없다. 이제 빨리 가야지.”하셨다. 또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전해라.”하셨다. 제자들이 엮어낸 법문집으로 『고우스님 육조단경 강설』과 『태백산 선지식의 영원한 행복』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