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속의 뱃길 따라 만난 비양도! 천천히 느린 속도로 꿈을 펼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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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속의 뱃길 따라 만난 비양도! 천천히 느린 속도로 꿈을 펼치다
  • 김익수 대기자
  • 승인 2021.09.14 1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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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 전경
비양도 전경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안에서도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한림항에서 북서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섬 하나가 서 있다.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섬. 섬이 오름이고, 오름이 섬인 곳 바로 비양도다. 비양리는 조선조 고종 13년에 서 씨가 처음 입주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고려 말 해상방어를 위해 망수(望守)를 배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황금어장으로 이름난 이곳은 바다산호가 유명하고, 오름의 분화구 안에는 유일한 비양나무가 자생하고 있으며, 비양도를 상징하는 나무로 제주도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보호 되고 있다.  

비양도 윤성민 이장
비양도 윤성민 이장

 

한림항에서 출항한 여객선은 15분 만에 비양선착장에 도착했다. 취재차 미리 섭외를 해두었던 윤성민 이장댁을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바닷물 빛이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장님은 고향이 어디신가요?
▶이곳 비양도입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지가 반세기를 훨씬 넘어서고 있습니다.
▷50이 넘어섰다는 말씀인데요. 그러시면 비양도의 모든 것을 샅샅이 잘 알고 계시면서 주민들과의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곳 비양도를 찾아오시는 분들은 연간 얼마나 되고 있는지요?
▶예. 지난 2016년을 지나면서 많은 분들이 찾아오기 시작해서 지난 2018년에는 18만 명이나 이곳을 다녀갔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서 개인은 물론 단체 관광객들이 무척 줄어들어서 섬이 조용한 편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 그렇습니까. 비양도하면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았으면 하시는지요?
▶주민들이 서로 서로 성급하고 서둘지 않은 방향으로 비양도를 가꾸어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발의 속도보다는 슬로시티라 할까요. 보존할 것은 잘 보존하고, 개발로 인해 자연이 마구 망가지거나 파손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관광객들이 비양도를 한 바퀴 들러보시고 돌아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을 종합해보면, 섬으로서 잘 보존되고 있는데, 관리가 제대로 안된 곳과 휴게실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이런 면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여 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광객들이 천천히 쉬었다 갈 수 있도록 체류하면서 힐링를 즐길 수 있는 방향도 조심스럽게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힐링과 체류라고 하면 숲이 떠오릅니다. 오름 가꾸기는 어떻게 힘쓰고 있는지요?
▶‘생명의 숲 가꾸기 사업’에 대해서 협약을 맺고 있는 가운데, 비양도에 적절한 수종을 택해서 식재하고 숲을 조성해나가고 있습니다. 
▷한림항에서 이곳 비양항을 오고가는 정기 여객선 운항시간에 대해서 불편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아침 9시에 한림항에서 첫출발하고 마지막 편이 오후 2시 30분이라서 한림에 나들이나 병원치료를 받고 돌아올 때는 시간이 촉박해서 불편한 점도 많습니다. 따라서 운항시간을 두 세 시간 연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쉽게 풀리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비양도 고순애  어촌계장
비양도 고순애 어촌계장

 

비양도에는 165명이 주민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 가운데 해녀가 25명을 차지하고 있다. 비양도 바당밭은 공동바다와 비양도만이 입어할 수 있는 두 바당으로 나뉘어지고 있다.
공동바당은 한림읍 관내 9개 마을이 함께 작업할 수 있는 바당이고, 비양도 해녀들만이 물질 할 수 있는 바당은 따로 있다.
이장댁에서 취재를 마치고 어촌계장댁으로 향했다. 물질작업하러 바당에 나가지 않고 댁에서 가게를 보고 있었던 고순애(54) 어촌계장을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무덥기는 합니다만, 오늘은 비양도 바다에서 호이 호이 숨비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다.
▶예. 오늘은 해녀들이 작업하러 나가지 않았기에 숨비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녁상에 오를 반찬거리로 보말 잡으로 얕은 바당에 든 해녀가 한 두 사람은 있을 겁니다.
▷어촌계장님은 해녀물질을 얼마나 해오시고 있는지요?
▶아, 예. 비양도에서 태어나서 열다섯부터 물질을 시작해서 40년 째 바당과 함께 하고 있습니니다.
▷해녀분들은 얕은 바당, 먼 바당으로 나누면서 상군, 중군, 하군으로 말씀을 하시던데요. 계장님은 어느 쪽에 속하는지요?
▶예. 저는 중군에 속합니다.
▷아니, 어촌계장님이 중군에 속하신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데요.
▶그게 그럽니다. 저는 매일 매일 바당에 나가지 않아서 바당길에 매우 익숙한 편이 못됩니다. 자주 물질을 나가야 그 바당길을 잘 알 수가 있고, 길을 잘 알면 물건이 어느 곳에서 얼마만큼 나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깊은 바당에서 숨을 오래 참을 수 있는 말하자면 폐활량이 커야 상군에 들어갈 수 있는 거라예. 비양리 마을 어장은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맞추어서 해녀들이 의논해서 물질하러 나갑니다. 공동어장에서는 한림읍 관내 9개 어촌계 해녀들이 배를 타고 와서 공동으로 입어하고 물질작업을 마치면 채취한 수산물을 갖고 돌아가게 됩니다.
▷요즘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물량은 형편이 어떻습니까?
▶날이 갈수록 물량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수종말처리장이 생기고 난 후부터는 물량이 줄어들고 있는데, 관계기관에서는 수질조사를 실시한다고 해놓고 아직까지 결과에 대한 통고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비양도 비룡암
비양도 비룡암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곳이 비양도인데, 어획한 고기나 수산물을 어떻게 판매하고 있는지요?
▶예. 우리 어촌계에서는 바당에서 잡자마자 활어나, 활소라 등 신선도를 유지한 채로 한림항이나 옹포항으로 가서 팔고 돌아옵니다. 해녀들 50%가 자그마한 보트를 갖고 있어서 큰 불편은 없습니다. 
▷이따금 바다에서 물질작업을 하다가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전해들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어촌계장님은 물질하는데 어떤 원칙이라도 갖고 계시는지요?
▶예. 바닷속 일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고, 힘들고,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르는 것이죠. 깊은 바닷물 속에서 물건을 보면 자기 숨이 다 되는 줄 알면서도 그 물건을 채취해야만 물 밖으로 나가겠다는 욕심 때문에 숨이 따라주지 못해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이라 봅니다. 물질을 시작할 때는 어떻게 하면 살아질까? 걱정하면서도 마음속으로 살다보면 살아진다. 물속에서도 숨 참는 것도 참아지고 살아가는데 힘든 것도 다 참을 수 있을 테니까. 하면서 하는 것이 지금까지 살아왔나 봅니다.
▷어촌계장님은 제일 기분이 좋을 때는 어떤 때인가요?
▶해녀라면 누구나 망사리가 가득 채워질 때가 가장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오래 비양도 바다가 수산자원이 풍부해질 수 있도록 어장관리에 힘써 주실 것을 발원합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비양 마을회는 이니스프리모음재단과 제주생명의 숲과 협약을 맺고 황근 자생지 복원사업을 3년 동안 진행해오고 있다. 또한 비양도의 녹색사업에 비양나무를 비롯한 편백, 산뽕, 산딸나무를 식재하는 등 쉼터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많이 힘써 온 분이 있다. 70년대 보이스카우트 야영활동과 해상쓰레기수거 활동으로 비양도와 인연을 맺어 제주지역 불국토를 위해 작은 나눔을 실천하는 불자인 고윤권 씨를 취재 중에 인터뷰 시간을 갖게 되었다. 섬을 아름답고 힐링의 치유 숲으로 만들어가려는 봉사하시는 분들에 대한 노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발걸음은 비룡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고요하고 적막이 흐르는 산사가 아니다. 하지만, 비룡암 사찰의 해수관음상 관세음보살은 남쪽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자비와 평화의 상징인 해수관음상 앞에 서니, 합장이 절로 나온다. 가족의 건강, 자신의 꿈과 사랑……. 모든 일들이 원만하게 잘 풀리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해본다. 
비룡암은 언제 어떻게 창건했을까. 궁금해진다. 주지 스님을 제주시 영암사에서 만나 얘기를 들었다.

▷제법 스님. 비룡암을 놔두고 이곳에 와 계셨군요. 비룡암엔 언제 가시렵니까.
▶예. 코로나19로 인해서 발길을 잠시 중단하고 있습니다. 조용히 있다가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비룡암에 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없어도 불자들은 스스로 법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발원도 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압니다.
▷비룡암을 창건은 언제 하셨고, 창건하게 된 계기는 어떻습니까?
▶예. 20년 전 일입니다. 1999년 4월 4일에 비룡암에 부처님 봉불식을 봉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인가 비양도의 불우 노인들을 위한 1일 관광을 주선하던 중에 어려운 사정을 알고 자비의 손길을 뻗었습니다. 주민들은 바람이 불어 배가 뜨지 않으면, 절에 가지를 못했었지요. 선착장에 도착하면 비양도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래서 기도터를 마련하기로 원력을 세운 것입니다.   

비양도 마을 전경
비양도 마을 전경

 

▷창건할 때에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서 3년 동안 비양도를 여러 번 오고 가면서 부처님을 모실 곳을 모색해보았습니다만, 사정이 여의치 못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98년 가을에 노인회장님의 주선으로 빈집을 빌어 수선하고 나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세 번이나 장소를 옮기면서 부처님을 모시게 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죠. 처음에는 컨테이너 2개를 이어서 주민들의 기도터를 마련하게 되었답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들게 기도 도량을 마련하게 되었는데요. 스님의 원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절에 가고 싶어도 배를 타고 뭍으로 나와야 하는 애환, 재력이 없어도 중생제도에 앞서신 스님이 아니었던가요. 주민들의 기도는 언제 올리고 있으신지요?
▶예. 기도하는 날은 매월 17일(음력)로 정하고, 해녀들이 물질하는 물때를 맞춰서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올리기로 돼있습니다. 아직도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비룡암은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어서 앞으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서 안정적으로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큰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예. 그러시군요. 어렵고 힘든 일도 스님의 원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코로나19가 빨리 종식되어서 자주 가보시지 못한 비룡암에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섬 속의 섬, 비양도의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의 웃음소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음이 마음 한 구석을 안타깝게 한다. 비양분교장이 2년 째 휴교상태다. 아이들이 없다면 비양도 미래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희망의 꿈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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