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길라잡이 (15) - 바른 마음챙김(正念, sammā-s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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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길라잡이 (15) - 바른 마음챙김(正念, sammā-sati)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10.1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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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띠행자 유현
사띠행자 유현

『쌍윳따 니까야』「분석 경」(S45:8)에는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팔정도)’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이 담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일곱째 정념[正念, sammā-sati]은 “몸에서 몸을 관찰하고[身隨觀],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고[受隨觀],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고[心隨觀],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法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념正念에서 염念은 빠알리어 사띠(sati)의 한역인데, 초기불전연구원을 중심으로 이 원어를 ‘마음챙김’으로 옮겨서 정착시키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학자도 있고, 영어로는 mindfulness로 표기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존재를 먼저 몸뚱이[身], 느낌[受], 마음[心], 심리현상들[法]의 네 가지로 해체해서 그 가운데서 하나에 집중한 뒤, 그 대상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나아가 네 가지 마음챙김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해탈·열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 satipatthānā]은 37보리분법 가운데 제일 먼저 나타나는 가르침으로서 초기불교 수행의 출발점이요, 불교 수행의 핵심이 담겨있어서 필자는 수행의 주춧돌로 삼고 있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사띠(sati)의 용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이것은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잊지 않는 것을 역할로 한다.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혹은 대상과 직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강한 인식이 가까운 원인이다. 혹은 몸 등에 대해서 마음챙김의 확립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기둥처럼 대상에 든든하게 서 있기 때문에 혹은 눈 등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 문지기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초기 경에 나타난 마음챙김에 대한 부처님의 세 가지 비유 설법을 여기서 인용하면서 사띠(sati)에 대하여 천착해보겠습니다.
<첫째> 마음챙김을 밧줄에, 그 대상을 기둥에 비유합니다. 『상윳따 니까야』의 「여섯 동물 비유 경」(S35:247)에서 마음챙김을 밧줄에, 그 대상인 여섯 동물을 여섯 가지 마음[六識]에 비유합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여섯 동물들을 밧줄로 기둥에 묶여 두면 제각각 이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다가 지쳐서 앉거나 눕게 되고, 결국 길들여 질 것이다. 여기서 튼튼한 말뚝이나 기둥이라는 것은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두고 한 말이라고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마음챙김을, 「마차 비유 경」(S35:239)에서 눈·귀·코·혀·몸·마노[意]의 여섯 가지 감각기능의 문을 보호하는 덧문에 비유합니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감각기능들의 문을 보호하는가? 여기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봄에 그 표상[全體相]을 취하지 않으며, 또 그 세세한 부분상[細相]을 취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가 눈의 감각기능이 제어되지 않은 채 머무르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그를 침입해 올 것이다. 따라서 그는 눈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하기 위해 수행하며, 눈의 감각기능을 잘 방호하고, 눈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한다.” 마음챙김은 이와 같이 여섯 가지 감관을 단속하고 문을 통해 들어오는 해로운 법들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마음챙김을, 「새매 경」(S47:6)에서 수행자의 고향동네에 비유합니다. “비구들이여, 자신의 행동영역이 아닌 남의 세력범위를 헤매고 다니는 자는 새매에게 낚아채 잡혀간 메추리와 같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의 행동영역이 아닌 남의 세력범위를 헤매고 다니지 말라. 자신의 행동영역이 아닌 남의 세력범위를 헤매고 다니는 자에게서 마라(=오염원)는 내려앉을 곳을 얻을 것이고 마라는 대상을 얻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자신의 행동영역이 아닌 남의 세력범위인가? 바로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다. 비구들이여, 자신의 고향동네인 행동영역에서 다녀라.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자신의 고향동네인 행동영역인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세 가지의 비유 설법에서 보았듯이, 마음챙김의 주요 기능은 여섯 감관 지키는 문지기 역할입니다. 사띠(sati)는 이와 같이 탐냄·성냄·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들어올 기회를 주지 않도록 수의守意, 즉 마음을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부수적으로 특정한 대상을 향해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나가는 기능을 하고, 내용적으로는 마음이 지금·여기에 현존하는 것이며, 분별적인 사유[尋]나 숙고[伺]에 휩싸이지 않고 대상을 알아차리고, 관찰하는(anupass) 아름다운 마음부수[心所, cetasika]의 하나입니다. 
일상에서 마음챙김을 놓아버리면 ‘감각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없다는 것과 같아서 감각적 쾌락에 빠지게 됩니다. 수행 중에도 사띠(sati)는 마음이 들뜸으로 치우치는 믿음과 정진, 그리고 통찰지로 인해 들뜸에 빠지는 것을 보호하고, 게으름으로 치우치는 삼매로 인해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보호한다고 『청정도론』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띠(sati)는 모든 요리에 맛을 내는 소금과 향료처럼 도 닦음의 모든 곳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므로 수행의 키워드라 할 수 있습니다.
바른 마음챙김[正念]과 분명한 앎[正知]는 초기경전에서 쌍둥이처럼 함께 자주 설하여지기 때문에 정확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코끝에서 들숨과 날숨을 ‘겨냥’하는 일은 마음챙김의 역할이지만, 그 들숨과 날숨이 심장 토대에서 일어나는 풍대風大의 작용이라는 점과 그 무상함에 대한 ‘통찰’은 분명한 앎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정념과 정지의 대상은 ‘나’ 자신입니다. 내 안에서 펼쳐지는 몸(물질)과 마음(정신)의 생멸 현상이고, 관념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준거가 된 「대념처 경」에서는 이런 나 자신을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으로 분류한 뒤에 다시 44가지로 세분하여 몸에 관련된 대상 14가지, 느낌에 관련된 대상 9가지, 마음과 관련된 대상 16가지, 법과 관련된 대상 5가지로 나누어 수행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누구든지 이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을 7년까진 아니더라도 7일 또는 몇 달을 닦는 사람은 지금·여기서 구경의 지혜를 얻거나 취착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불환과 (아나함)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보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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