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가 만난 사람 - 한국불교 태고종 원당사 주지 성심 스님 - 관세음보살님의 자비심으로 어루만지네
상태바
제주불교가 만난 사람 - 한국불교 태고종 원당사 주지 성심 스님 - 관세음보살님의 자비심으로 어루만지네
  • 김익수 대기자
  • 승인 2021.11.09 13: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걷는데 평온함이 안긴다. 그래서일까? 아침저녁으로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머물고 싶은 곳이 아닌가 싶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곳이라 산사의 길은 늘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열어놓는다.  
절로 가는 길. 제주올레 18코스를 따라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도심 속에 원당봉 기슭에는 조계종 불탑사와 태고종 원당사가 서로 마주보고 있고, 그 갈림길에 천태종 문강사가 자리잡고 있다.
귤림추색(橘林秋色), 노랗게 익어가는 감귤이 사찰 경내를 감싸안고 깊어가는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산사의 작은 문으로 들어서니 확 트인 시야로 아름다운 약사여래불과 대웅전이 들어온다.
마중 나오신 원당사 주지 성심 스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원당사 주지 성심 스님
원당사 주지 성심 스님

▶성심 스님. 오래 만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어서오십시오. 
▶언제오더라도 힐링의 쉼터로 소박한 자연이 주는 친근함으로 편안함을 느끼게 합니다. 
▷예. 찾아오시는 분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그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듣습니다. 산길이지만 가파르지 않고 걷는데 부담을 느끼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도심 속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숲을 이루고 있어서 조용한 가운데 산책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라 느끼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스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한 말씀 들었으면 하는데요.
▷예. 출가하게 된 배경이라면, 청소년시절부터 몸이 허약해서 위미 서광사로 1년 동안 예불 보러가는 것이 저에겐 큰 기도였습니다. 관세음보살 기도를 통해서 병마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는데, 이 같은 인연으로 서광사에서 동산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고 출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 후 동산스님이 창건한 제주시 용담동 성광사에서 2년 동안 스님을 시봉하고, 배움에 매진해야겠다는 열망으로 충남 계룡산 동학사 강원에서 사집과. 대교과를 수료하였습니다.
▶그러시면 이곳 사찰 원당사에는 언제 오시게 되었는지요?
▷예. 그러니까. 원당사에는 지난 1976년부터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만,   스물두 살에 원당사에 온 후에 33살에 은사님을 잃게 되어 가슴이 미어짐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이곳에 와보니, 절에서는 부처님께 올리는 맑고 깨끗한 공양물을 바닷가 샘터로 내려가서 물허벅 등짐으로 물을 길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보살님들이 물을 길어 나르려고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 후 사찰 내에 지하수 관정시설을 설치해 공양물 재료를 씻는데 편리함을 제공하게 되었답니다. 그런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50여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군요.    

▶사찰경내가 꽤나 넓고 시원스럽습니다만, 원당사 사찰 역사도 많은 시간이 쌓이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원당사의 내력을 잠시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아, 예 그러니까. 약 1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24년 하시율 스님이 초가 법당을 짓고 백양사 원당포교소로 불법을 펴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2대 주지로 송재술 스님이 부임하면서 사찰로서 기반을 다져나가면서 스님은 1936년 7월 대웅전과 해탈문 등을 증축해나갔는데, 당시 대웅전터는 현재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제주의 4.3 사건은 제주불교에 크나큰 피해를 남겼습니다. 원당사도 그 가운데 피해를 입은 사찰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사찰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도 말씀을 주셨으면 합니다.
▷포교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가운데 1946년 12월에 일본에 거주하던 유동산 스님이 3대 주지 옹립과 더불어 중흥기를 맞게 되었죠.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1948년 4‧3사건의 광풍이 원당사에도 들어닥쳤습니다. 다행히도 원당사 건물 중 대웅전은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4‧3 당시 토벌대들이 대웅전을 불태우겠다고 할 때도, 대웅전을 허물어 학교를 짓겠다고 할 때도 부처님의 영험 때문인지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4‧3 당시 소개지역 내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보존된 대웅전이었을 것입니다. 
대웅전에는 4대 주지 도명 스님이 1946년 모셔 온 소조여래좌상(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 만든 불상)을 봉안했는데, 4‧3으로 소개 된 후 마을의 한 쇠막(외양간)에 모셨는데, 그 쇠막은 불탔는데도 부처님만은 무사했습니다. 
그 후에도 도명 스님은 부처님을 모시고 6년간 피난 아닌 피난 생활을 했고, 1956년 폐허가 된 도량을 보수, 불사를 통해 예전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답니다. 1958년 대웅전 및 객실 보수 불사를 마치고 나서 태고종 제1세대 종정인 국묵담 스님을 초청, 보살계 및 예수재를 봉행하는 등 사세(寺勢)를 확장해 나가게 됩니다.
1980년 3월 원당사 중흥에 힘쓰셨던 도명 스님 입적 후 유동산 스님이 다시 주지직을 승계하게 되며,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아 1992년 도명 스님의 상좌이자 그동안 절 살림을 도맡아왔던 제가(성심 스님) 주지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 대웅전과 사천왕문 등 불사의 원력을 이어갔고, 지난 1988년 반 지하 2층 형태인 요사채를 완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성심스님께서는 6대 주지로 소임을 맡고 수행과 불사에 임해오셨는데, 스님이 평생 어떤 분을 존경해오시고 계시는지요?
▷예. 물론 은사님이십니다. 어느 날인가 기억납니다. “동산스님은 한 겨울에 방문을 열어놓고 주무시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여쭈었는데, 스님께서는 부처님은 차가운 법당에 계신데, 어찌 나 혼자 편하고자 문을 닫고 편히 잘 수 있느냐”되물으셨습니다. 늘 마음에 새겨두고 수행하는데 교훈으로 삼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오랫동안 불사나 법회, 정기적인 기도를 올리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요.
▷예. 물론입니다. 부처님 법이 마음에 편안함을 안겨주고, 도량에 오면 산란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진다는 신도들의 발걸음이 뚝 끊기어버렸습니다. 일상이 확 변해 버렸습니다. 초하루 법회 때도 신도들은 부처님 도량을 많이 외면하게 되나 봅니다. 
▶일상이 변하고 있으니, 부처님의 도량도 신도분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바꿔보는 것도 한 방편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 많이 달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법회가 봉행하고 나서도 음식공양물을 함께 나눠먹는 즐거움과 덕담의 시간이 마련되지 않아서 신도들 간에도 간극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찰이 기도와 수행만이 아닌 힐링이나 명상의 시간도 많이 할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불자들께 어떤 말씀을 전하고 싶으신지요?
▷예. 중생들에게 마음 편암함을 주는 도량조성이 최우선돼야 한다고 봅니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대웅전이 손볼 곳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발원은 대웅전 중창 불사라 할까요. 힘닿는데까지 울력을 다해보려고 마음 먹고 있답니다. 은사 스님이 일념으로 원당사를 위해 신심을 바치셨듯이, 저의 소임을 다하고, 늘 하심하며 묵묵히 수행자로서 가야할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스님의 발원이 이뤄지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오늘 소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성불하십시오.

산문을 나서면서 중국의 뛰어난 선승. 조주선사의 ‘차 한 잔을 하게나’라는 요사채 벽에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기억하면서 노승의 걸음으로 아쉬운 원당봉을 내려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