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4·3피해 증언마당 - “저는 4·3에 희생된 스님의 후손입니다”
상태바
제주불교4·3피해 증언마당 - “저는 4·3에 희생된 스님의 후손입니다”
  • 김익수 대기자
  • 승인 2021.11.17 13: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탐라성보문화원·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주최
지난 11월13일 제주불교 4·3 피해 증언마당 열려
제주불교 4·3 증언마당에서 증언을 경청하고 있는 참석자들
제주불교 4·3 증언마당에서 증언을 경청하고 있는 참석자들

사)탐라성보문화원과 제주특별자치도의회4‧3특별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이 지난 13일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도내 기관단체장과 도 관계관, 도의회 길상회 의원, 사찰 신도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에서 사)탐라성보문화원 이사장이신 도월 관효 스님은 인사말에서 “코라나19로 인해 2년 동안 미루어왔던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이 오늘 늦게나마 열리게 되었다”면서 “훌륭한 지혜로 진상이 정확하게 규명되고 상생과 화합으로 제주불교가 제주발전에 앞장서는데 노력하고 있음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성봉 스님에 대한 증언에 나선 금붕사 주지 수암 스님
이성봉 스님에 대한 증언에 나선 금붕사 주지 수암 스님
탐라성보문화원 이사장 도월 관효 스님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탐라성보문화원 이사장 도월 관효 스님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어서 환영사에서 제주특별자치도의회 4‧3특별위원회 강철남 위원장은 “오늘 증언마당을 통해 4‧3으로 인해 입은 제주불교의 비극과 제주현안에 적극 대처했던 제주불교의 높은 뜻을 널리 알리고 이를 통해 제주불교의 밝은 미래를 여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사)탐라성보문화원 김진희 기획국장의 진행으로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이 이어졌다. 
이날 첫 번째 금붕사 주지 수암 스님의 증언이 있었다. 
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구좌읍 하도리 금붕사 창건주 이성봉 스님은 1948년 4‧3이 발발한 후 고향인 하도리 창흥동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낮에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저녁에는 속가인 창흥동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1948년 음력10월21일 이성봉 스님이 법당에서 사시예불을 드리고 있는데,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그 소리를 쫓아 뛰쳐나갔던 스님의 눈앞에는 목동이 바람처럼 지나갔다고 한다. 그 뒤로 총을 든 군인들이 헐레벌떡 뒤쫓아 왔고, 숨을 들이킬 사이도 없이 군인들은 이성봉 스님에게 “이 앞을 지나간 목동을 못 봤냐”고 다짜고짜 물었다. 이에 이성봉 스님이 “모른다”고 말하자 그들은 사상이 의심된다며, 곧바로 스님에게 총부리를 겨눴다고 한다. 그리고는 6방의 총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래도 생명이 끊어지지 않자 군인들은 망설임 없이 바로 방아쇠를 스님의 심장 쪽으로 잡아 당겼다고 한다.  “타당!”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금붕사 도량을 붉게 물들였다. 군인들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양철집인 대웅전과 스님이 기거했던 초가 요사채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초가집은 불을 지르자 금세 타올랐고, 다행히도 대웅전은 삼분의 일만 타다 남았다. 그러나 이성봉 스님이 흙으로 빚어 직접 만든 나한상 등은 불에 그슬려 손만 닿아도 부스러졌다. 
당시는 군인들이 무서워서 제 때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겨우 군인들이 돌아가자 식구들은 이성봉 스님의 총탄 구멍에 좌복의 솜을 떼어다 그 안을 막았고 총탄으로 온 몸이 벌집이 되어 버린 스님의 시신을 수레에 실었다. 그리고 이성봉 스님의 고향인 행원 가족묘지에 묻었다. 가족들은 이 같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다시는 없기를 바라면서 이성봉  스님이 아미타부처님 품안에서 극락왕생하시길 발원했다. 
“어린 시절인데도 어머니와 이모님이 대성통곡하는 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암 스님의 증언은 비장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1940년생으로 이성봉 스님의 외손자인 수암 스님 (現 금붕사 주지)이 할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이처럼 토해냈다. 당시 수암 스님은 부모님을 따라 전남 여수에서 지낼 무렵이었기 때문에 4‧3의 광풍에 온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성봉 스님이 돌아가시면서 금붕사는 수암 스님의 어머니와 이모, 스님까지 4대째 이어오고 있다. 이성봉 스님은 16나한을 흙으로 직접 만들어서 법당에 봉안할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성봉 스님의 손때가 묻어 전해지는 ‘오백나한 탱화’는 다행히도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이 탱화는 화엄사에서 수행했던 이성봉 스님이 1925년 제주에 내려오면서 함께 가지고 온 것이란다. 그러나 아쉽게도 탱화의 제작연대와 작가는 모두 지워져 있다. 
수암 스님은 금붕사나유타합창단을 통해 금붕사가 4‧3당시 폐허로 변해버린 당시의 애절함과 이성봉 스님의 가슴 맺힌 한을 풀어내는 공연을 기획하며 금붕사의 4‧3피해 사실을 문화예술적으로 승화해내기도 했다.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 3회에 걸쳐 게재할 예정으로, 다음 주에는 제2편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계몽운동에 앞장선 의인 원문상 스님에 대해 제주불교와 교육계에 원로이신 조명철 님의 증언마당이 어어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