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 4·3증언마당 - “원문상 스님, 학생들에겐 존경받는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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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4·3증언마당 - “원문상 스님, 학생들에겐 존경받는 스승”
  • 김익수 대기자
  • 승인 2021.11.23 0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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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철 님의 스승 원문상 스님에 대한 증언
구속자 명부엔 좌익사상 극렬자로 기록되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의로운 분이라고 기억하고 있어
제주불교 4·3 증언마당에서 증언에 나선 조명철 님
제주불교 4·3 증언마당에서 증언에 나선 조명철 님

지난 13일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 그 두 번째로‘예비 검속에서 희생당한 원문상 스님에 대한 증언을 제주불교 및 제주교육계 원로인 조명철 님으로부터 듣는다.  
만허 원문상(滿虛 文常, 1908 ~1950)스님은 1945년 12월 관음사 제주읍내 포교당인 대각사에서 열린 ‘조선불교혁신 제주불교승려대회’의 부의장을 맡아 불교혁신을 주도한다. 1947년 고향인 하원으로 돌아와 중문중학원에서 역사와 한문, 동양사 등을 가르치며, 교육자의 길을 걷다가 1948년 당시 중문중학원 1학년으로 입학한 조명철 회장과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게 된다.
조명철 님의 회고다. 14살 무렵 청소년 시기에 조 회장의 눈에 비친 원문상 스님은 스님이 아닌 교사였다. 원 스님은 왜소했지만 박식함과 막힘없는 언변과 에너지까지 갖춘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원문상 스님
원문상 스님

조명철 님은“원문상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스승으로 유명했어요. 우리에겐 역사를 가르치셨는데, 책을 보지 않고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꿰뚫고 계신 분이었죠. 특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일방통행이 아닌 소통을 하셨습니다. 역사가 아닌 인생의 이야기든, 종교이야기든 늘 질문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중문중학교는 번듯한 학교 건물이 아니라 중문 향사를 빌려 중학원을 개원하게 된다. 원문상 스님과 이경주 선생님을 중심으로 건립되었고, 학교장은 이성주 선생님이셨다. 하지만 1948년 4‧3이 발발하면서 이성주 선생이 육지로 피신하신 후 이경주 선생 중심으로 운영돼오다, 4‧3의 발발로 무장대에 의해 향사가 불타면서 중문 마을 창고에서 2학년이, 중문예배당에선 1학년이 수업을 겨우 연명해,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중문학원은 처음에는 중학원 인가 학교였으나 제주4‧3 서귀포지역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전부일 소령이 배려로 인근 삼나무를 벌목해서 학교를 다시 세웠는데, 그 고마움의 뜻을 전하고자 소령의 가운데 ‘부’자와 중문의 ‘문’자를 따서 ‘부문중학교’로 개칭하게 되었고 1950년 4월 정부인가 정식학교로 인정받게 된다.
그런데 교육자였던 원문상 스님과 이경주 선생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예비검속으로 행방불명된다. 스님은 당시 승단에서도 개혁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다. 당시 지식인층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이 강했다. 당시 부문중학교에는 서북청년단 출신 인물이 교감으로 부임했다.
1950년 8월 원문상 스님과 이경주 선생은 4‧3 가담혐의가 덧씌워져 군경에 체포됐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이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1950년 7월 서귀포경찰서 ‘공무원 구속자 명부’에 의하면 원문상 스님은 ‘좌익사상 극렬자’로 기록되어 있었고, 이경주 교사의 경우 ‘망원경을 소지해서 산사람 하고 연락했다”는 기록이 되어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지역민들의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의로운 분이라고 기억되고 있다.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 다음 주 제3편은 원천사에서 희생당한 고정선 스님에 대한 증언을 대원정사 회주 보각 스님으로부터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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