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2) - 순환·변화하는 원리를 담은 道가 바로 常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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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함께하는 ‘노자’ 산책 (2) - 순환·변화하는 원리를 담은 道가 바로 常道
  • 글·고은진 철학박사
  • 승인 2021.11.3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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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도를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常道(상도)가 아니다.”
이 첫 구절의 강한 인상은 마치 선승들의 일구도리처럼 일반인의 상식을 뒤흔든다. 그런 의미에서 1장은  『노자』의 알파요, 오메가다. 상식적인 의미로는 가 닿을 수 없는, 체득해야 마땅한 道(도)의 세계로 노자는 道(도), 名(명: 언어), 常(상), 欲(욕)이라는 굵직한 개념을 사용하여 우리를 인도한다.
道(도)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의미한다. 길은 길 이전에는 길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길이 되었을까? 어떤 사람이 우연히 걸어간 곳이 길이 되었을 수도 있고, 권력자가 길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우연히 걸어간 곳이 길이 되기 위해서는 뒷사람이 그 길을 따라 걸어가 주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뒤따라 간 길이 영 불편하고 위험하다면 그 길은 폐기될 수 있다. 따라갔는데 편하고 유익하고 즐거울 경우 그 길은 계속 존재하게 된다. 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권력자가 힘으로 길을 만들었다한들 그 길이 유지되는 경우는 그 길이 편하고 안전하고 그 길을 걷는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걷는 대부분의 길은 오랜 시간 동안 이와 같은 검증 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길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도 있다. 인류뿐만 아니라 생명체가 존재하게 된 데에는 제각각 존재하게 하는데 편하고, 안전하고 유익한 삶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과학 문명을 활용한 삶의 방식이 일반화되기 전 인류는 우주 자연의 질서 속에서 우주 자연의 흐름에 맞게 삶을 살아왔다. 그 삶의 방식이 바로 道(도)이다. 
우리 가까이 우주 자연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일출과 일몰, 월출과 월몰, 이에 따른 달의 변화와 사계절의 변화 등등일 것이다. 해 뜰 때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고, 계절의 변화에 맞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살아간다면 유익하고, 편안하고, 안전하다. 이러한 삶이 도에 맞게 살아가는 삶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道(도)란 이런 것이라고 확정짓게 되면 이는 순환, 변화하는 도가 아니라 확정된 道(도)이므로 실상인 도와 거리가 있게 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달력 또한 확정지어 놓은 도와 같다. 그래서 항상 착오가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순환, 변화하는 현상을 못박아 고정시킨 대표적인 것이 언어이다. 나는 시시각각 변하지만 내 이름은 작명 이래 변한 적이 없다. 언어는 순환변화하는 현상을 담기에는 너무도 역부족하다. 그러기에 도를 도라고 언어로 개념화하게 되면 순환, 변화하는 우주 자연의 원리를 담고 있는 도의 실체를 담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언어로 담을 수 없는 순환, 변화하는 원리를 담은 도가 바로 常道(상도)이다. 
 『노자』에 대한 수많은 해설서들을 살펴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장 常道(상도)에 대해 영원불멸이라 해석한 부류와 늘 그러한, 혹은 진정한으로 해석한 부류가 그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된 후 가장 단순한 분류 체계가 기준을 정하고 기준에 맞는 것과 맞지 않은 경우로 나누는 것이다. 
삶에서 우리가 가치를 정할 때 흔히 쓰는 기준이 오래 두어야 할 것, 지금 쓰고 말 것이다. 영원불멸은 유한한 인간이 늘 꿈꾸는 이상향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많은 종교가 영원불멸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이런 소망이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常道(상도)를 영원불멸로 해석할 경우 종교적 느낌이 강해진다. 서양 학자들이  『노자』 를 보고 흥미를 느끼는 많은 경우 이 대목에서 영원불멸로 해석한다. 그러나 중국적 사고 체계 속에는 영원불멸의 개념이 희박하다. 중국의 가장 대표적 개념인 음양은 서로 순환하는 개념이지 영원불멸의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감산스님의 경우 常道(상도)를 명칭과 형상이 끊어져 말로 도달할 수 없는 영원의 도로 해석한다. 道(도)는 진실 불변의 도이고, 名(명)은 억지로 표현한 거짓 이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스님은 형상이 없고 명칭이 끊어진 도는 근본적으로 지극히 텅 비어, 천지가 모두 이 도로부터 변화되어 나왔다고 보았다. 
다음의 구절 ‘이름이 없음은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이 없음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는 끊어 읽기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왕필은 無(무)와 有(유)로 끊어 읽었고, 여기서는 無欲(무욕)과 有欲(유욕)으로 끊어 읽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무와 유로 끊어 읽는 것이 해석상 매끄럽다고 여겨지지만, 왕필의 냄새가 짙어질 것을 우려하여 무욕과 유욕으로 읽었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의미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기에 무욕과 유욕으로 끊어 읽었다. 왜냐하면 뒤에 나오는 “이 둘은 함께 나와 이름을 달리한다.”에서 이 둘이 무와 유를 의미하건, 무욕과 유욕을 의미하건 『노자』의 의미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바로 유와 무, 유욕이나 무욕은 待對(대대)적 사고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대대적 사고와 함께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인과적 사유다.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 익숙한 인과적 사유론자들은 현상을 이루게 하는 원인을 추구하는 데 익숙하다. 이러한 사고는 다분히 縱(종)적이어서 나를 지칭하는 다양한 접근 방법 중 어느 집안 몇 대손으로 명명하는 것과 흡사하다. 
그에 비해 대대적 사고는 橫(횡)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루는 음식, 시대상황, 교육체계, 교우 관계 등등으로 접근한다. 『노자』의 가장 대표적인 대대적 관계가 유와 무이다. 1장에서는 유와 무를 무욕과 유욕으로 해도 다르지 않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이름만 다르다. 그래서 오묘한 것이다. 유와 무, 무욕과 유욕은 천지의 시작이자 만물의 어머니이기에 모든 현묘한 것들이 들락거리는 門(문)이 된다. 玄(현)은 검다기 보다 모든 색을 담고 있는 그윽하고 오묘한 색을 일컫는다. 무와 유, 무욕과 유욕은 그 그윽하고도 그윽한 문으로 들락거리는 것이다. 문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한다.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한다. 그 모든 것들이 드나들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이 되어야 한다. 유와 무, 무욕과 유욕은 흡사 음양의 개념이 있기 전에 모든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었지 않았을까? 
학자들 중에는『노자』를 형이상학적으로 읽는 것이 중국적 사고와 맞지 않음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 앞에 펼쳐진 현상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중국인 또한 어떻게 해서, 무엇이, 우주 자연을 존재하게 하는 지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노자는 그 속에서 텅 빈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운 만물을 하나로 보고 현묘하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가 아직 신화적 세계에 머물렀던 2500여년 전 이미 道(도)와 존재, 우주 자연에 대해 사유했다는 것은 노자의 특이점이면서 동시에 상당히 놀라운 점이라 하겠다. 
불교의 경우는 대대적 사고와 인과적 사고를 모두 담고 있다. 부처님 성도 후 최초 설법이 바로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이다.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 바로 대대적 사고이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가 고집멸도에 의해 생성하고 소멸함을 보여주는 것은 인과적 사고이다. 불교적 사유는 중국적 사유에 비해 훨씬 심오하고, 다차원적이며 층위가 깊다. 왜냐하면 중국적 사유는 세간만을 다루는 데 비해 불교적 사유는 세간과 출세간을 모두 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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