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각 스님에게 듣는 고정선 스님에 대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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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 스님에게 듣는 고정선 스님에 대한 증언
  • 김익수 대기자
  • 승인 2021.11.3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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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 청년 활동 했던 고인수 스님이 원천사에 은신했다가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면서
4·3 원천사 주지 고정선 스님 토벌대에 의해 총살
제주불교 4·3 증언마당에서 증언에 나선 보각 스님(맨 오른쪽)
제주불교 4·3 증언마당에서 증언에 나선 보각 스님(맨 오른쪽)

지난달 11월13일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주불교 4‧3피해 증언마당 그 세 번째로 원천사에서 희생당한 고정선 스님에 대한 증언을 대원정사 회주 보각 스님에게 듣는다.
1940년에 태어나신 보각 일조 스님(애월읍 수산리 대원정사 회주)은 아홉 살에 일어난, 4‧3의 광기를 아직도 뇌리에서 잊지 않은 듯 고스란히 기억해 냈다. 아버지는 대전 형무소에 끌려갔고, 어머니는 두 살의 여동생을 등에 업은 채 아버지를 찾으러 갔던 게 화근이었다. 경찰이 어머니를 강제로 데리고 나가자 할머니까지 따라 나섰다가 도피자 가족이라고 총살당해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친누나와 셋째 아버지 그리고 삼촌까지, 4‧3의 광풍이 스님의 집안에 휘몰아친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을 정도로 이 하귀마을의 유지였죠. 그 시절이 그랬듯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희생을 당했습니다.”
4‧3의 시초가 됐던 5.10총선거 반대로 인해 단국중학교 교장과 선생 등이 경찰의 수사 선상에 올랐고 그 가르침을 배운 학생들도 산으로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사람의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던 시대라 스님의 아버지 삶도 지역주민의 밀고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된다. 주정공장에 수용됐다가 다시 석방되었다가 다시 잡혀가 전기고문을 당하는 등 결국 대전형무소에 끌려갔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충격과 공포는 트라우마가 됐을 것이다. 시름시름 앓던 스님은 결국 부처님을 의지하게 된다. 열다섯 살이 되던 1954년, 4‧3에 의해 훼불 됐던 수산봉 기슭에 자리한 원천사에서 출가하게 된다.
원천사는 1933년 최청산 스님에 의해 애월읍 구엄리 초입의 원물 지경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4‧3이 발발하면서 고인수 스님이 남로당 청년 활동을 했는데, 원천사에 은신했다고 한다. 이 사실이 토벌대에 의해 발각되면서 원천사는 그야말로 풍전등화를 맞게 된다. 다행히도 원천사의 불상과 탱화, 불구는 물론 건축자재도 중산간의 극락사로 옮겨, 겨우 화를 면한다. 하지만, 4‧3당시 원천사 주지였던 고정선 스님은 토벌대에 의해 총살되었다. 고정선 스님은 불교청년운동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벌였던 이일선, 이세진 스님의 상좌이다. 이후 사찰의 재건된 것은 1953년 최청산 스님이 상좌였던 방동화, 선두석, 오춘송 스님이 극락사로 옮겨갔던 불상화 불화, 불구들을 찾아와 현재의 수산봉 위치로 이전하면서이다. 이전할 당시 사명을 원천사로 개명했다. 그럼에도 현재, 불상과 불화를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지금 대원정사에는 원천사에서 전해지는 유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후 원천사는  1961년에 대한불교법화종에 등록되었고,1981년에 이르러 일조 보각 스님이 대원정사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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