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호 시인이 들려주는 내 마음을 젖게 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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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호 시인이 들려주는 내 마음을 젖게 하는 시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12.14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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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사슴의 눈도 늙어가나 - 고산지대(高山地帶) 

고형렬 (1954 ~ )

파란 고산지대엔 벌써 가을
처연함에 반소매는 아무래도 짧은 것 같죠
또 언제 이렇게 되었나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첫가을이 온 것은

​아침 해도 스치면 떨어지는 이슬을 먹으려고
산마루에 떠올랐다 그 해 있는 곳은
시의 나라에선 천공 속의 바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파도와 흰 구름과 새벽과 함께

​이렇게 파란 배추와 무는 처음 보았네
한 번쯤 팔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게 되는 것은
다시 거둘 수 없는 생의 높이 때문일지
어른보다 먼저 아이들 얼굴에
가을이 와 있었다

​아이들이 늘 세상과 아버지를 걱정하죠
가을은 그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또 지나가고
생채기 하나 유리금 긋는 저 고산지대
어디서 사슴의 눈도 늙어가나

 

오영호 시조시인
오영호 시조시인

고형렬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다.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창비 편집부장, 명지대 문창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윗 시는 유심작품상 수상작이다. 심사위원들은 “한 시인이 정서의 편안함과 아득한 정신의 혼란스러움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이런 경우는 우리 시사에서 보기 드물다”며 “그는 우리 시가 지닌 서정적 전통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예외적이고 독특한 자신의 길을 개척한 형이상학적 시인”이라고 평했다. 강원도 하면 떠오르는 것이 많지만 고랭지 무와 배추가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고산지대엔 가을이 먼저 와 있을 것이다. 서정적 자아는 아이의 마음같이 새파랗게 돋아나는 것들을 보고 있다. 해는 떠오르고 지고,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고, 아이는 어른이 된다. 기다리지 않아도 어김이 없이 그렇게 된다. 우리는 언젠가 생(生)의 고산지대에서 한 마리 사슴의 눈으로 보게 될는지 모른다. 맑음과 새롭게 온 가을을. 그리고 어떤 쓸쓸함과 늙음과 쇠약함도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진솔한 자신에게 회귀하는 담백하면서도 진중한 내적 성찰과 상상력이 빛나는 시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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