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특집 - 제주불교가 만난 사람 - 이유근 아라요양병원 원장 - “나누고 함께 하는 일, 바로 나를 위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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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특집 - 제주불교가 만난 사람 - 이유근 아라요양병원 원장 - “나누고 함께 하는 일, 바로 나를 위한 길”
  • 김익수 대기자
  • 승인 2021.12.21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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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지 못하면 어쩌면 요양병원에 입소해야 할 팔십이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주지역의 열악한 요양병원 실태를 안타깝게 생각 해오던 중에 뜻을 같이하는 지인 여섯 분이 만나 지난 2016년에 제주시 아라동에 요양병원을 개원했다.
199개의 병상을 갖춰 각종 암과 치매, 뇌졸중, 관절염, 퇴행성 간병을 필요로 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전문요양병원이다. 제주불교가 만나보는 사람, 오늘은 이유근 아라요양병원 원장님과 함께 시간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이유근 아라요양병원 원장
이유근 아라요양병원 원장

1983년 한국병원, 1999년 한마음 병원 개원
2015년 요양병원 개원한 지 6년째 맞이해 

▶원장님 오래 만에 뵙겠습니다. 지난 11월에 큰 상을 받으셨죠.  ‘아산상인 자원봉사상’  늦게나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수상 소감 한 말씀 주셨으면 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상을 받을 때마다 늘 마음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주변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힘들게 사회를 위해 훌륭한 일들을 많이 하셔셔 공덕을 쌓으신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원장님은 제가 알기론 대정읍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개구쟁이 시절,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시절이 어려운 때가 아닙니까. 도민들은 하루 밥 세끼 먹기가 어려운 환경에 있었기에 재미나는 추억거리는 별로 없습니다만, 할아버지가 당시 대정향교에서 전교로 있었습니다. 늦둥이가 돼서 키도 작고 몸이 왜소해서 할아버지께서는 밖으로 나가 놀려고 하면, 위험한 곳에는 다니지 못하도록 많은 경계를 두었답니다. 하루는 바닷가에 나가 낚시를 하다가 그만 솔치에 쏘여 마음고생과 함께 아픔을 겪기도 했었습니다. 그 후로는 낚시질도 그만두었고, 마을 동료들은 수영도 잘해서 선창가에 나가 물놀이도 재미있게 하는 것을 보고, 수영을 배워보려고 노력했지만, 겨우 단거리 정도 헤엄을 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격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봤다는 게 기억이 새롭습니다.
▶가정환경은 어떤 편이었습니까.
▷아버님은 열여덟 살에 전라남도 금융조합에 근무하고 있어서 함께 동거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님은 제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래서 고교 3학년 때 대학은 가고 싶은데, 부모님이 과연 허락해줄 것인가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대학을 가려면 의대를 가야한다고 강조하셨죠. 아버지께서도 입시 5개월을 앞두고 그 때 비로소 허락을 해주셨는데, 죽기 아니면 살기로 입시 공부에 몰입했습니다. 
그 당시 할아버지가 왜 의대로 진학을 권유했던 이유는 이렇습니다. 집안사람들이 자신보다 열 분이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것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집안에 의사가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건강관리를 잘 하는데 크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하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당시만 하더라고 제주에서 의료가 얼마나 낙후된 상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의대로 진학하기로 결심을 내렸죠.
▶그러면 의대로 진학해서는 어떤 꿈을 갖고 사회를 바라보셨는지요?
▷예. 대학시절 원대한 꿈의 설계는 종합병원을 개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은 일은 정신과 김성희 교수님이셨는데, 종합병원의 꿈을 꾸려면 먼저 ‘인성’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깊이 생각해보니, 가슴에 와 닿는 조언이었습니다. 
사회에서 폭넓은 소통을 통해서 맡은 역할과 서로 이해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서는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얘기였습니다.
▶의대를 졸업하시고 고향에 내려와 의료 활동에 전념해오셨는데, 그 과정도 얘기를 들었으면 합니다.
▷예. 제가 병원을 개원할 때만 하더라고 제주에는 종합병원 의료가 낙후된 상황이라서 종합병원을 설립하고 개원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를 두었던 것이죠. 임상병리과, 마취과, 방사선과 소아과, 정형외과 등 제주시 취약지구인 허허벌판에 한국병원을 설립하고 개원(1983년)하게 됩니다. 80병상으로 출발해서 160병상으로 확장하는 유래 없는 일을 만나게 됩니다. 이어서 1999년에는 2년 가까이 걸려 한마음 병원을 설립 개원하게 되는데, 그 당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병원설계가 나온 바로 그 시점에 외환유기(IMF)를 맞게 돼, 자금을 동원하는데,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주거지역에다 장례식장이 함께 한다는 것에 주민들이 반대가 있어서 이를 이해시키고 설득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2008년 제가 정년을 얼마 앞두고서는 머지않아 자신도 노양병원으로 가야 할 것을 생각하면서 노양병원 설립의 꿈을 열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나마 노후 자금을 조금 마련해 두었었는데. 그래서 지인들과 함께 2015년부터 요양병원을 건립하게 시작해서 종합병원의 면모를 갖추고 2016년 연말, 개원하게 이르게 됩니다. 벌써 개원한 지도 6년째가 되나봅니다. 
▶바깥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집안의 많은 조력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사모님으로부터 도움 받으시는 일이라면?
▷예, 저는 술과 눈썰미, 거짓말을 못합니다. 그래서 정치에는 나설 수가 없었고 나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사람은 저가 모자라는 눈썰미를 도와주고, 도리나 이치에 밝다고나 할까요, 그런 점에 더해주고, 밖에 나갈 때 코디네이터에 대한 역할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원장님께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인생의 좌우명이라할까요? 
▷예. 늘 마음의 자리 잡고 행동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개인주의사회가 너무 팽배해지면서 무슨 일이든 자기에게 이롭게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아전인수(我田引水)만 고집 부린다면 소통과 이해는 거리가 너무 멀어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죽는 날까지 사회에 진 빚 갚는 것이 봉사”

▶봉사란 한 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예, 나라와 사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힘을 다해 일하는 것이라고 사전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나, 저는 봉사란 먼저 나눔 개념으로 출발하고, 갚는 마음으로 마무리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많은 은혜를 입고 성장하고 있기에 이를 잘못인식해서 혼자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분들도 볼 수 있는데, 저는 능력이 있다고 다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는 날까지 사회에 진 빚을 갚아나가는 길이 바로 봉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 일부에서 많은 분들이 저를 보고 정치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으로 보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잖습니까. 소의(小醫)는 육체의 병을 고치는 의사이고, 중의(中醫)는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이고, 대의(大醫)는 사회나 국가를 치료하는 의사라고 보신다면 그런 오해는 자연스럽게 풀릴 것으로 봅니다.   
▶주변에서는 흔히 성공이란 단어를 아주 쉽게 표현하고 가치를 높이 평가하시지 않은 분들도 있는가 봅니다. 원장님께서는 무엇이 성공이라고 생각해오고 있는지요?
▷예. 저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詩를 존경합니다. 이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아 아이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자기가 태어나기 전 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이 시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이에 적합한 인물이라면 ‘빌게이츠’, ‘워런 버핏’ 이 성공적인 인물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창올림픽이 개최하게 되었을 때 원장님께서는 성화봉송 주자로 뛰셨는데, 그 당시에는 어떤 마음이셨는지요?
▷올림픽은 평화의 상징이 아니겠습니까. 남북이 평화롭게 나아가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성화를 봉송했었는데요, 지금은 남·북이 교류가 끊긴 상태에 놓여 있어서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어려운 이웃들이 삶을 꾸려나가기란 무척 힘들어 합니다. 이러한 분들에게 나눔에 대해서 한 말씀 주신다면.
▷예. 이렇게 고통스럽고 힘들 때 온정의 손길을 펴는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죠.
이럴 때일수록 가진 자가 또는 사회고위층들의 솔선수범이 더욱 절실하다고 봅니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라고 할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사회는 더욱 건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손길로 따뜻한 온정을 펴시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액수가 크고 작음에 개의치 않고 나누려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끝으로 앞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예.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병원 일에 종사하면서 아쉬운 점이라면, 원로가 없다고 할까요. 그것은 지역사회가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도민들이 존경할만한 인물이 많지 않은 게 안타깝게 느꼈던 일입니다. “꿈꾸는 큰 바위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예. 언제가 들은 기억은 있습니다만. 
▷예 그러시군요. 미국의 있는 어느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평범한 주인공인 어니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이 바위산을 보고 자랐으며, 어머니로부터 언젠가 저 바위산과 닮은 얼굴의 위대한 인물이 등장할 것이라는 전설을 굳게 믿고, 어린 시절, 청년, 장년,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살면서 큰 바위 얼굴과 닮은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는데, 마침내 네 명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장님께서도 아직 그런  ‘꿈꾸는 큰 바위 얼굴을 가진 인물을 만나지 못하셨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되는지요.
▷없다고 생각하면, 그런 ‘꿈꾸는 큰 바위 얼굴’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꿈을 가진 사람이 언젠가는 나오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신축년 한 해도 저물어 갑니다. 그런데도 코로나19는 소멸되지 않고 진행 중입니다. 어떤 마음을 갖고 지혜롭게 이겨내야 할까요?
▷예. 위드 코로나(단계적 일상회복)도 멈추고 다시 사적모임이 강화되고 방역도 강화되고 있습니다만, 코로나19는 끝이 보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거리두기 강화에 따른 방역수칙에 대한 내용을 철저히 준수해나가면서 예방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봅니다. 
▶원장님. 오늘 소중한 시간을 내주시면서 좋은 말씀을 많이 주셨습니다. 밝아오는 임인년 새해 건강하시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사랑의 손길을 기대하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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