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과 死를 뛰어넘는 진리의 횃불 - 사성제·팔정도·12연기 ⑻ - “와도 그곳 가도 그곳 모두가 매한가지 어디에 얽매여서 미련이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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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과 死를 뛰어넘는 진리의 횃불 - 사성제·팔정도·12연기 ⑻ - “와도 그곳 가도 그곳 모두가 매한가지 어디에 얽매여서 미련이든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1.1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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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환 박사 - 사단법인 21세기불교포럼 공동이사장 - 초기불전연구원 선임연구원
황경환 박사 - 사단법인 21세기불교포럼 공동이사장 - 초기불전연구원 선임연구원

옛 제정(帝政) 러시아에는 1724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세인트페테스부르크대학 (ST.Petersbaurg)이 있는데, 이 대학의 교훈은 “이곳에서 영원하리라.”라는 것입니다.
이 대학 출신 슈체르바스키 박사(1866-1942)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불교학자입니다. 그 박사님이 일본에 갔을 때 법화경을 소의경전(所依輕典)으로 하는 일련종의 한 사찰에서 많은 신도들이 법당에서 함께 ‘나무묘법연화경’만 지속적으로 합송하는 것을 견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박사님이 법회가 끝나고 법당에서 나온 한 신도에게 당신의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신도가 “예, 일련종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다시  “일련종이 무슨 종교입니까?”라고 물었는데,  그 신도가 “예. 불교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그 박사님은 그날에 생긴 느낌과 생각에 대하여 저서에서 이렇게 밝혀 놓았습니다. ‘나무묘법연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한 중국불교와 고오타마 붓다의 불교와는 아무관계가 없다고 단정적으로 지적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분 박사님의 일침에 공감하면서 ‘나무묘법연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일련종’이라는 종파와 위대한 고오타마 붓다의 불교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불교는 부처님께서 자신의 깨달은 바를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르침이고, 그 가르침대로 따라 가면 불교의 궁극적 진리인 고통(고성제)과 고통의 소멸(멸성제)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대자유의 해탈과 열반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실려 있는 5부 니까야(경전) 안에는 ‘묘법연화경’이란 말은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테라와다 불교)를 처음 나에게 가르쳐 준 나의 스승이자 불교학자이며 위대한 과학자 김사철 박사는 대승의 교리를 기본이념으로 하여 중국 사람들이 만든 대표적인 종파들을 살펴보면, 중국의 도교가 인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선종불교가 태동했고, 중국의 북방 무속신앙이 인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정토종으로 태동했고, 그 외 법화종(천태종), 화엄종, 삼론종, 법상종, 율종, 진언종 등등으로 그 가지를 쳐 나아갔고, 선종은 또 다시 5가(家) 7종(宗)의 가지로 뻗어 나갔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6~7세기 중엽쯤 대승불교가 인도에서 몰락할 무렵 티베트 등지에서 태동한 깨달음을 형상화하는 탄트라불교도 있다고 합니다. 이 탄트라불교는 다양한 주문들로 가득한 경전들로 구성된 특색이 있는데 후세에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몰락할 즈음 인도의 서역 지방으로 폭넓게 전파되다가 힌두교의 시바파 가운에 특히 성력(性力)을 숭배하는 아류들과 결합하면서 타락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 서기 12세기까지 인도에서 지속되다가 그 후 대중적 신앙 종교인 힌두교에 흡수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슈체르바스키 박사가 설득력 있게 지적했듯이, 마하야나(대승) 논사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고 고오타마 붓다는 초월적 신이 되어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요약하면, 불교를 표방한 여러 종교와 종파가 있는데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자유이요, 몫이지만 그런 부류의 불교는 명칭만 불교이지,
고오타마 붓다의 가르침과 동일한 불교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고오타마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은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하는 4가지 고귀한 진리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시작이고 또한 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깨달음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는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위대한 고오타마 붓다이므로 그 어느 누구라도 불교에 대한 최고의 권위는 단연코 고오타마 붓다를 능가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소위 부처님의 제자인 불자라고 하면서 이러한 진실을 부정한다면 그 사람은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가 자인하는 셈이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분명하게 인식했으면 합니다. 물론 이 또한 이런 인식을 수긍하든 아니하든 그것도 자신의 자유이고 몫이고 선택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주제별로 모은 『상윳따 니까야』의 대미를 장엄하는 「진리 상윳따」(S56:1)에는 ‘사성제’가 주제입니다. 여기에는 131개의 경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삼매를 닦는 이유는 사성제를 꿰뚫기 위해서이며 출가자가 되는 이유도 사성제를 관통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사색을 할 때도 말을 할 때도 사성제를 사색하고 사성제에 대해 말을 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성제를 완전히 깨달았기 때문에 여래, 아라한, 정등각자라고 부르며 사성제를 알고 보기 때문에 번뇌가 멸진한다고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사성제의 진리인 첫 번째 각지의 고(苦, dukkha), 즉 삶이라는 것이 철저히 고통이라는 실존적 현실을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알지 못하면 절대 신심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신심이 생긴다 해도 그것은 가짜배기 신심이지 바른 신심이 아닙니다.
대승불교 경전인 『화엄경 현수보살품』에서 아무리 신심은 공덕의 어머니요, 도의 근본이라고 선전을 하고는 있지마는 신심을 가지려고 하면 다시 말해 신심이 도의 근본이 되고 공덕의 모체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신심을 일으킬 수 있는가?’ 라는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방법 내지 방편에 대하여는 설명이 없습니다.
신심이라는 것은 내가 일으키려고 해서 일으켜질까요? 하루 종일 절 3000배한다고 해서 그것이 신심의 발로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면 무릎만 고장납니다. 절 3000배하는 그런 열정을 바르게 공부하고 수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면 금상첨화가 될 텐데 말입니다. 
승찬 대사는 바르지 못한 수행의 무서운 과보를 「신심명」에서는 ‘호리유차이면 천지현격’에 비유해서 말을 했지 않았습니까? 절을 3000배, 10000배하는 것만으로는 바른 수행의 길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길을 정확하게 알고 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스탭 바이 스탭(Step By Step)으로 사성제를 사색하고 사성제에 대해 말을 하고 사성제를 알고 보기 때문에 여래, 아라한, 정등각자라고 부르며 사성제를 알고 보기 때문에 번뇌가 멸진한다고 부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듯이, 탐·진·치가 멸진하면 그 자리가 바로 닙바나의 경지 즉,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는” 그 자리이지요. 
이 구절은 문무대왕의 유훈에도 나오는 시 구절이기도 한데 문무대왕은 아마도 깨달음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여실지견(如實知見)을 한 것 같아요. 신라 30대 문무대왕은 여러분들이 너무도 잘 아는 신라통일의 주역이고 문무를 겸비한 신라 천년 역사의 56 왕 가운데 으뜸이신 대왕입니다. 
이 분의 유훈이 이렇습니다. “사해의 바다에서 이리저리 뒹굴다가 내 돌아가는 곳이 어디이든가? 놀다가 돌아갈 땐 미련도 아쉬움도 모두 다 내려놓고 내가 쓰던 이 몸도 불태울 텐데 와도 그곳, 가도 그곳 모두가 매한가지 어디에 얽매여서 미련이든가? 지난날 영웅호걸 참으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쌓아놓은 봉분에는 나무꾼과 목동들의 지게 장단 놀이터요 토끼와 여우는 그 옆에 굴을 판다.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내가 죽거들랑 내 몸을 불살라서 동해바다 어구에 뿌려라.”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이 위대한 문무대왕의 세계,  와도 그곳, 가도 그곳, 모두가 매한가지 어디에 얽매여서 미련이든가? 야 멋있잖아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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