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거 -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할 뿐이다”
상태바
동안거 -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할 뿐이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1.19 0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국선원 신축년 동안거 결제 법문이 지난달 12월 법회에서 이어졌다. 혜국 큰 스님은 우리 불자들이 바깥으로 마음을 쓰면서 내 안에서 해답을 찾지 못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시면서 화두 일념의 정진이 왜 필요한지를 거듭 이야기해주시고 계시다. /편집자주

외국에서 남방에도 안거법이 아직 다 전해져오고 있지만. 한국 선방에서 그 많은 스님들이 같은 방에서 똑같은 시간을 정진하고 같이 공양을 하는 그런 안거 제도는 우리나라가 어쩌면 유일합니다. 그래서 일부스님들과 학자들은 이 안거를 세계 유네스코의 문화재로 등록을 해야 된다고 얘기할 만큼 이 안거란 참으로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다른 학문은 바깥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대통령이 잘못 나와서 그렇다, 아들딸이 잘못해서 그렇다 며느리가 잘못해서 그렇다 하는데.
부처님 법에서 보면 일체가 내 앞에 있다, 내 마음에 있는 것이지 바깥에는 있다는 자체가 그것을 받을 일이지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연기법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우리 수행자들이 나를 바깥으로 찾고 있는가 안으로 찾고 있는가 한번 돌아보셔야 됩니다. 만약에 내 눈에 남이 잘못이 보이거나 남이 허물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건 벌써 내가 바깥으로 눈을 돌린, 내 인생을 뺏기는 시간이고 내 인생을 낭비하는 시간이고 오직 화두 하나 “어째서” 이것이야말로 내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방법인데.
 
그러면 요 근래에 와서 왜 한국 땅에서 그렇게 도인이 안나옵니까?
여러분 내가 저 하는 말이 간화선에서만 도인이 안 나오고 다른 데서는 도인들이 나옵디까?
세상 보는 눈이 모든 것이 컴퓨터라고 휴대폰이라고 모든 것이 내 안에서 해결하는 게 아니라 밥도 휴대폰에 컴퓨터에서 찾고 모든 것을 바깥에서 찾는 문화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싹 차노니까.

내가 인과법을 믿는 사람이라면 공부가 안 되면, 
아! 내 마음 밭에 이만큼밖에 농사를 못 지었구나 
이만큼밖에 닦지 않았구나 일체의 모든 것을 내 마음밭에 내 안에 가만히 돌아와서
내 마음밭의 농사가 이것뿐이라면 이건 누구의 허물도 아니고 오직 내 자신으로부터다.
그럼 지금 이 정도밖에 안 됐다고 해서 포기하면 영원히 마음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것이고. 만약 마음 농사를 못 짓는다면 무엇을 할 것이냐.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지만 
지금 경주 저 경상도가 우리 경주가 신라고, 저 충청도 가서 공주가 백제인데 지금은 공주도 우리나라요, 경주도 우리나라지만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계백장군 김유신장군 연계소문 장군들이 자기 나라를 위해서, 자기 가족을 자기 칼로 목을 그어 가면서까지 그렇게 처절하게 싸웠는데 과연 그분들한테 뭐가 남았습니까? 계백 장군은 백제를 위한다고 김유신 장군은 신라를 위한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 눈에 볼 때는 한 나라를 가지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허공 속에서
남국선원 허공이 석종사 허공이요 석종사 허공이 해인사 허공이요 해인사 허공이 미국 허공이요 중국 허공이요 일체가 한 허공 속에 사는데.
그 한 허공은 거의 신경을 안 쓰고. 
남국선원 법당은 이렇게 지었다 해인사 법당은 이렇다 백양사 법당은 이렇다. 
법당 모양이  있는데, 바깥으로 찾는데 이어졌기 때문에 여러분들 잘 알다시피 이 공부가 그렇게 어려운 거요. 

육조단경을 보면
육조 혜능 행자가 오조 스님을 찾아가서 방아를 8개월 동안 찧었는데
게송을 지어 바치라고 하니 신수 스님이 “신지 보리수요 심어명경대라 시신근불식하여 물사야진애라”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의 대와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않게끔 말지니라)  하는 게송을 지으니 모든 사람들이 그걸 외우고 돌아다니는데.
방아 찧는 육조 스님은 그 앞을 지나가면서 그 게송을 외우니까, 그 게송이 어떤 게송입니까 하고 물으니 오조스님께서 법을 전하려고 게송을 지어 바치라고 해서 지금 신수스님이 지은 게송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이 그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아! 저기 능가대상소를 지으려는 회랑에 있다고…”했습니다. “그러면 그 회랑이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육조스님이 묻습니다. 

육조단경 볼 때마다. 
예를 들어서 남국선원 저쪽 선방에 있는 사람이 여기 후원은 어디 있는 걸 모를 정도라면 이 말입니다. 오로지 일념에 있었다는 겁니다. 오로지 방아 찧는 일념.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대한 마음에 지견이 열렸기 때문에 오직 머무는 바 없이 그거야말로 화두일념이거든요. 선방에서 후원이 어디 있는지도 물을 정도로 가보지를 않고 오롯이 매달리는 일념. 

시간과 공간이 끊어진 자리.
다시 말해서 생각의 감옥을 벗어난 자리입니다.
그렇게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난 것을 벽을 허물어 버리면 
남국선원 선방도 없고 한 허공이 되듯이
아… 내가 내 생각의 감옥에서 내 생각의 벽을 내가 얼마나 허물어봤는가!

심지어 화두까지도 자기 생각의 감옥 속으로 집어넣어버린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어떤 데서 그걸 느낄 수 있냐 하면 
공부 조금 했다 하는 사람이.. 이건 나를 보고 하는 말이라..
옛날 한참 화두 좀 된다고 할 때,
되면 된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그거는 안 되는데.
아! 오늘 화두가 좀 되네… 오늘 한 2시간 거의 가까이 “어째서…”하는 게 이어지는구나.. 
그러면 둘 중에 하나요! 그때가 딱 되면. 
이걸 빨리 깨달아가지고 성철 큰스님께 가서 한번 좀 들이대 봐야겠다는 그런 이제 마음이 일어나는 건 하나고. 

또 하나는 이 정도 되면 그대로만 지켜나가면 되겠구나… 하는 그런 마음에서 지키고 있는 둘 중에 하나예요. 그런데 둘 다 잘못된 거면 둘 다 생각이라는 감옥 안에서 집어넣었단 말이… 지금에 와서 공성을 본 자리에서 볼 것 같으면
그때쯤 되면 생각을 이렇게 할 게 아니라…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할 뿐이다.” 
이 화두일념으로 들어가는 이거야말로, 생각 끊어진 자리고,
이거는 그냥 할 뿐이지 여기서 내 생각을 붙일 필요가 없다. 
그러려면 스승을 철저히 이길 수 있어야 되겠다.
조주 스님이라고 하는 몇 백 년 전에 살던 몇 천 년 전에 살던 분이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요것이 조주의 본 얼굴이다. 나는 조주 스님이라고 하는, 마조 스님이라고 하는, 성철 큰스님이라고 하는 서옹 방장 스님이라고 하는… 그런 스승들과 다 한몸이니까.  
그런 분들을 내가 가슴에 안고 있구나… 이 그릇을 놓치면 깨져버린다 없어져 버린다
내가 이런 스승을 내가 머리에 이고 있구나. 
그걸 아는 스승에 대한 믿음만 딱 들어갔다면 볼 것 없이.
스승이 “뜰 앞에 잣나무니라”. “無니라” 라고 보여주는 시간이고, 나와 남의 둘이 아닌 시간을 보여주는 시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