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과 死를 뛰어넘는 진리의 횃불 - 사성제·팔정도·12연기 ⑼ - “인식을 바꾸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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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과 死를 뛰어넘는 진리의 횃불 - 사성제·팔정도·12연기 ⑼ - “인식을 바꾸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2.01.25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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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두기-
황경환 박사께서 2021년 7월 24일 ㈔21세기불교포럼 정기법회 시 ON/OFF 라인으로 강의하신 말씀을 본지가 편집하여 10여 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황경환 박사- 사단법인 21세기불교포럼 공동이사장 - 초기불전연구원 선임연구원
황경환 박사- 사단법인 21세기불교포럼 공동이사장 - 초기불전연구원 선임연구원

불교에서 진리는 명확하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이고 빠알리 어로는 “짜타리아리야 삿짜니”입니다. 사성제 가운데 도(道)성제인 8정도를 『청정도론』에서는 일곱 가지 청정으로 분류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초기불교 교학의 주제인 온(蘊), 처(處), 계(界), 근(根), 제(諦), 연(緣)을 『청정도론』의 ‘혜품’에서는 통찰지의 토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 법사께서는 통찰지의 토양이 되는 교학체계의 5각지에 대한 설명을 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내외(內外) 육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진리는 사성제로 해체해서 보고, 나고 죽는 생사의 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면 앞에서 말씀드렸던 삼계의 세 가지 특상인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부연해서 말씀드리면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말과도 일치한다 하겠습니다. 
여기서 교학의 주제가 되는 6번째 각지가 12연기 또는 12고리인데, 시작은 무명(無明)이고, 끝이 노사(老死)로 되어 있습니다. 즉 나는 왜 늙고 병들고 죽느냐에 대한 원인은 무명(무지)이 그 시작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무명(무지)이라는 원인을 명지로 전환하면 죽음이라는 그릇된 인식의 오류에서 벗어난다.’ 라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그렇다면 무지의 인식을 명지의 의식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바꿀 것인가? 다름 아닌 팔정도의 수행을 통해서 바꾸라는 것입니다. 
2020년 2월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4개 부문 수상의 쾌거를 이룩했습니다. 그 시상식 자리에는 할리우드 여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고 2004년 세상을 바꾸는 세계 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21세기 가장 위대한 ‘여성 리드 상’에 선정된 ‘제인 폰다’가 있었습니다.
그 여배우는 봉준호 감독에게 작품상 시상 직전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인식을 바꾸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다시 한 번 반문을 했거든요. 
그렇습니다. 저 역시 오늘 이 강좌에서 제인폰다의 ‘인식의 전환’에 대한 이 말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저도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한번 던져 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왜곡된 자신의 인식을 바꾸는 것보다 더 다급하고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나는 제인 폰다가 말한 ‘인식의 전환’의 메시지는 온 인류에게 던지는 사자후에 비유할 수 있다고 어느 일간지에 기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기생충> 영화가 보여준 왜곡된 인식은 산냐의 인식이고,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런 전도된 인식의 바탕에서 전개되고 또 마지막 장면에서 비참한 결과를 초래함을 시사해 줍니다.
왜곡된 무지의 인식에 사로잡혀 번뇌의 속물이 되면 그러한 인식의 결과는 ‘기생충’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비참한 과보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지옥, 아귀, 축생, 수라의 사악처가 아니고 뭡니까? 
“산냐(saññā, 인식)에서 판냐(paññā, 지혜)로”라는 명제는 불교 수행의 노른자위입니다. 반복적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무지의 인식을 명지의 의식으로 바꾸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다급하고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안목(眼目)이 있는 자는 볼 것이요, 이근(耳根)이 있는 자는 들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산냐에서 판냐로”라는 이 명제는 바꾸려고 해서 내 자신이 바꿔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천만에요. 여기에 대해서 중부 「삿짜까의 짧은 경」(M35)에서 부처님과 ‘삿짜까’ 사이에  오고간 대화가 있는데 단정적으로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기웻사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는 ‘오온(五蘊)은 나의 자아다.’라고 주장하는데, 그대는 ‘내 오온은 이렇게 되고,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그 오온을 지배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 악기웻사나여,
왜냐하면 그 오온은 네 것이 아니고 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뭐라 그랬느냐? 실라(계), 사마디(정), 판냐(혜)라고 하는 팔정도의 길을 걸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요컨대, 팔정도를 닦고 완성하면 나의 의식은 무지의 ‘산냐’에서 명지의 ‘판냐’로 전환이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도 얘기 했지만 다년간 불교공부를 해왔다는 분들께 팔정도의 첫 번째 각지인 정견(正見)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 본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불교 수행의 시작과 중간과 끝은 팔정도로 귀결되는데 팔정도의 정견이라는 게 뭡니까? 이렇게 불자들에게 물으면 답변이 시원스럽지 못합니다. ‘꽃은 꽃으로 보고, 물은 물로 보고, 산은 산으로 보고, 강은 강으로 보라.’는 말로 대답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은유적 표현으로는 어찌 불교공부를 한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아마도 그렇게 대답하는 분들은 고오타마 불교가 아닌 엉뚱한 공부를 하면서 자신은 불교공부를 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정견(삼마-디티, sammā-ditthi)은 고집멸도라고 하는 사성제를 바르게 본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한마디 더 보충 설명을 하자면 12연기의 열두 고리 사슬에 대하여 명확하게 알고 보라는 뜻도 포함됩니다.  
무지의 인식 속에 갇혀있는 나 자신을 명지의 의식으로 점점 바뀌도록 노력하는 공부가 불교 공부이고 또 수행입니다.  모가라자 경에서 부처님께서 “모가라자여, 사띠를 확립하고 실체를 고집하는 편견을 버리고 세상을 공(空)으로 보십시오. 그러면 죽음을 넘어 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관찰하는 님은 죽음의 왕은 보지를 못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르는 것이 무지고 무지를 타파해 버리고 명지의 의식 상태가 되면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한낱 꿈속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12연기에서 12고리의 첫 번째가 무명 또는 무지인데 무명의 원인 때문에 순간을 즐기기 위해 탐착한 갈애의 불선업이 오래오래 고통을 가져다주는 과보가 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러한 불교 이론의 대명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선지식을 찾아가 반드시 자신의 아는 바를 철저하게 점검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는 개념으로 보는 것은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니며, 바르게 보지 못하면 묶이고 묶여서는 고통 받는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금강경의 4구 게 중에서, [제1구 게]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입니다. 이 게송의 뜻도 인식된 모든 모습은 진실한 모습이 아니며 진실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실상(實相)을 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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